반복된 사망 사고, 대통령의 '소년공 질문'이 만든 산업현장 개혁 첫걸음

| 스마트에프엔 = 이장혁 기자 | "일주일에 나흘씩, 밤 7시부터 새벽 7시까지 12시간씩 연속으로 일하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25일, 경기 시흥 SPC삼립 시화공장을 찾은 이재명 대통령은 허영인 SPC그룹 회장과 김범수 SPC삼립 대표에게 이렇게 물었다. 강경한 어조였다. 이어 "같은 방식, 같은 시간대에 반복된 죽음은 사고가 아닌 구조의 실패"라고 지적했다.
이날 간담회는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라는 명목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분위기는 단순한 현장 점검을 넘어, 대통령이 기업 오너를 추궁하는 이례적인 장면으로 흘러갔다. 회의는 이 대통령의 모두발언으로 시작됐고 이어질 업계 발표 순서를 그는 직접 제지했다. "그 전에 묻겠습니다"라며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됐다.
윤활유 작업 중 사망···세 번째 같은 새벽
SPC삼립 시화공장에서는 5월, 크림빵 생산 라인에서 윤활유를 뿌리던 50대 여성 노동자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졌다. 작업 시간은 새벽이었다. 1년 전인 2023년 8월에도 샤니 성남공장에서 50대 여성 근로자가, 2022년 10월에는 SPL 평택공장에서 20대 여성이 각각 소스 교반기와 기계에 끼어 목숨을 잃었다. 모두 새벽 시간대, 모두 여성, 모두 생산 라인 사고였다.
대통령이 SPC를 점검한 것은 이 사망 사고가 세 번째였기 때문이다. 그날의 현장은 단순한 감사가 아니었다. 이 대통령은 경위, 교대시간, 노동 강도 등을 김 대표에게 집중적으로 캐물었고 납득할 수 없는 답변에는 "그건 모르면서 얘기하는 거 아닌가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어릴 적 공장에서 일하던 소년공이었다. 기계에 끼여 팔을 다친 경험이 있다." 이 대통령은 개인사도 언급했다. "그때도 빵공장은 참 힘든 곳이라고 생각했다"며 "이제는 더는 누가 죽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SPC, 이틀 만에 변화 발표···"야근 8시간 넘기지 않겠다"
대통령의 질책은 기업의 빠른 대응을 이끌었다. SPC는 간담회 이틀 뒤인 27일, 그룹 대표이사 협의체인 'SPC 커미티'를 통해 생산 구조 전면 개편안을 발표했다. 핵심은 야간 근무시간을 8시간 이내로 제한하고 2조 2교대 비중을 2027년까지 20% 이하로 줄이는 것이다. 전체 인력 중 절반 가까이가 야간 12시간 교대를 하고 있다.
공장 가동 시간도 24시간에서 20시간 이내로 줄인다. 불가피한 품목을 제외한 대부분의 야간 생산을 줄이겠다는 방침이다. 물리적 설비 변경도 함께 추진된다. 낡은 설비 8기를 내년 6월까지 철거하고 AI 기반 자동화 공장 신축에 2000억 원 이상을 투자하기로 했다.
김범수 대표는 "야근과 연속근로로 인한 피로가 사고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 만큼, 구조 자체를 바꾸겠다"고 밝혔다. 인력 보강과 교대 재편을 통해 '지속 가능한 노동 환경'으로 바꿔가겠다고도 말했다.
SPC는 2022년, 안전 설비 확충을 위해 3년간 1000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번 조치는 그 약속의 연장선이지만, 이전보다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대응이다.
대통령실 "기업 움직였다···생명보다 귀한 빵은 없다"
대통령실은 SPC의 결정에 대해 "대통령의 지적 이후 나온 변화로, 실제로 기업이 움직였다"고 평가했다. 강유정 대변인은 "이재명 대통령은 생명을 귀히 여기고, 안전을 위한 비용은 충분히 감수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며 "이번 결정은 대통령의 현장 중심 국정 철학이 반영된 결과"라고 밝혔다.

다만 대통령실은 '야근 8시간 초과 금지'가 정부의 공식 기조인지에 대해서는 "어떤 선을 일률적으로 넘으면 벌칙이라는 방식이 아니라, 안전을 최우선하는 문화와 구조를 만들겠다는 뜻"이라고 부연했다.
이날 대통령이 언급한 콘티빵 이야기도 주목을 받았다. "옛날에 콘티빵 기억나시죠? 그 공장에서 제 아버지가 일하셨고, 형님도 삼립공장에 근무하셨습니다." 대통령의 이 발언은 과거엔 빵을 만든 노동자 가족의 아들로서, 현재는 국정 책임자로서 전하는 경고이자 당부였다.
정치가 바꾼 기업, 그러나 숙제는 여전
산재는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야근을 줄이는 것만으로 안전이 확보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현장 질책 한마디가 기업의 전사적 시스템 재편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SPC 사례는 분명한 메시지이자 전환점이다.
문제는 지속성이다. 노동계는 "구조적 문제는 하청, 비정규직, 도급 방식에서 비롯된다"며 "현장의 목소리를 수렴한 상시 안전 점검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고용노동부가 운영 중인 근로감독 특공대의 효율성도 다시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SPC는 말이 아닌 시스템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매뉴얼만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 없다. 공장 자동화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를 하나의 '기계 부품'으로 보지 않는 문화와 인식의 전환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일하러 간 사람은 일만 하고 돌아와야 한다'는, 너무도 단순한 상식을 되찾기까지, 얼마나 많은 '반복된 새벽'이 있었는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