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서치테크기업 '아젠다북' 설문조사 분석
한국 명절 문화의 격변···절반은 지키고 절반은 내려놔

지난해 9월 독도와 동해를 경비 중인 동해해양경찰서 독도경비함 3016함에서 승조원들이 민족 대명절 추석을 맞아 함상 차례를 지내고 있다. /사진=연합
지난해 9월 독도와 동해를 경비 중인 동해해양경찰서 독도경비함 3016함에서 승조원들이 민족 대명절 추석을 맞아 함상 차례를 지내고 있다. /사진=연합

| 스마트에프엔 = 이장혁 기자 | 한국의 대표 명절 추석이 변곡점을 맞았다. 오랫동안 '당연한 의례'로 여겨지던 차례 문화가 더 이상 절대적 규범이 아니다.

4일 인공지능(AI) 기반 리서치테크기업 '아젠다북'에 따르면 성인 909명(9월29일 기준)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차례를 지낸다'와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응답이 46% 대 47%로 갈라졌다. 수천 년 이어온 관습이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다. 명절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선택의 시대로 진입했다.

전통을 지키는 이유···가족과 조상에 대한 예의

차례를 지낸다고 응답한 46%는 여전히 전통의 가치를 중시한다. 이들 가운데 24%는 자택에서, 11%는 친정·본가에서, 또 다른 11%는 친척이 모여 간소화된 형태로 차례를 지내겠다고 답했다.

/자료=아젠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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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역시 변화를 반영한다. 본가·조부모 댁(37%)이 가장 많지만, 현재 거주지 자택(27%)에서 지낸다는 응답도 눈에 띄었다. 60대 이상은 자택 차례(42%)와 성묘 중심(24%) 응답이 높아, 고령층에서조차 방식의 변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료=아젠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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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를 지키는 동기는 명확하다. '조상님께 감사드리는 마음',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의미', '아이들에게 전통을 가르치고 싶다'는 응답이 대표적이다. 형식보다 의미를 중시하는 태도가 여전히 차례 문화의 핵심 동력이다.

전통을 내려놓는 이유···가족 합의가 변화의 촉매

반면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고 답한 47%는 이유부터 달랐다. 가장 큰 요인은 '가족 합의로 간소화하거나 대체하기로 했다'였다. 종교나 개인적 불편 때문이 아니라, 가족들이 논의 끝에 합의한 결과라는 점이 중요하다.

현실적 이유도 뚜렷하다. 준비 시간과 노동 부담(31%), 비용 부담(21%), 이동·교통 불편(17%)이 뒤를 이었다. 여성 응답자 54%가 '가족 합의'를 꼽아, 전통적으로 차례 준비의 부담을 짊어졌던 여성들이 간소화에 더 적극적임을 확인시켰다.

세대별 차이도 뚜렷하다. 젊은 세대(18~39세)는 노동·비용 부담을 더 크게 꼽은 반면, 50대 이상은 가족 합의를 통한 간소화를 선택했다. 젊은 세대는 실질적 부담을, 기성세대는 합리적 절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세대별 인식의 분화가 드러난다.

/자료=아젠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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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준비의 현실···비용과 노동의 불평등

차례를 준비하며 가장 큰 어려움은 비용(38%)과 가족 일정 조율(33%)이었다. 이어 노동 분담 불평등(26%), 예법의 까다로움(23%)도 주요한 부담으로 꼽혔다.

성별 격차는 뚜렷했다. 여성의 43%가 '비용 부담'을, 36%가 '노동 분담 불평등'을 지적했다. 남성의 경우 각각 33%, 17%에 그쳤다. 명절 노동이 여전히 성별 불균형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역별 차이도 흥미롭다. 강원·제주는 비용 부담(55%)이 전국에서 가장 높았고, 서울은 메뉴 선정·조리(22%)와 가족 일정 조율(34%)이 두드러졌다. 지방과 대도시의 생활 구조가 차례 방식에 그대로 반영된 셈이다.

차례를 간소화하는 방식으로 가장 많이 선택된 것은 '차례 대신 가족 식사 중심'(47%)이었다. 이는 의례의 형식은 내려놓되, 가족이 모이는 본질적 의미는 지키려는 현실적 대안이다.

이어 음식 품목·양 축소(30%), 성묘만 진행(26%), 절차 단축(22%)이 뒤를 이었다. 주목할 점은 60대 이상에서도 가족 식사 중심이 57%로 가장 높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고령층이 현실적 대안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료=아젠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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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본질···소멸 아닌 진화

이 같은 변화는 단순한 편의 추구가 아니다. 1인 가구 증가, 핵가족화, 여성의 경제활동 확대, 코로나19 팬데믹 경험이 맞물리면서 명절 문화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동하고 있다.

다른 조사도 이를 뒷받침한다. 롯데멤버스 조사에서는 추석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응답이 64.8%에 달했다.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 조사에서는 성인 절반 이상(55.9%)이 '앞으로 제사를 지낼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조상을 기리는 마음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차례 대신 성묘나 가족 식사로 대체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 롯데멤버스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59.3%가 '성묘는 간다'고 답했다. 형식은 변해도 의미는 남는 것이다.

세대 간 소통···가족 사랑의 본질적 가치 지켜야

변화 과정에서 세대 갈등은 불가피하다. 전통을 중시하는 기성세대와 현실적 부담을 우려하는 젊은 세대의 간극을 메우려면 대화와 합의가 필요하다.

아젠다북 조사에서 차례를 지내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가족 합의'였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이는 갈등을 피하는 가장 현실적 해법이 가족 구성원 간의 진솔한 소통임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명절 문화가 더욱 다양화될 것으로 본다. 전통 차례상을 고집하는 집, 간소화된 가족 식사로 의미를 이어가는 집,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명절을 보내는 집이 공존하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족 사랑과 조상 존중이라는 본질적 가치다. 형식은 달라져도 명절의 가치는 여전히 살아 있다.

선택의 시대···존중의 문화 가져야

차례를 지낸다 46%, 지내지 않는다 47%. 이제 명절에는 더 이상 하나의 표준이 없다. 각 가정이 상황과 가치관에 따라 선택할 뿐이다.

필요한 것은 존중의 문화다. 다른 선택을 비난하기보다, 그 뒤에 깔린 가족에 대한 사랑과 전통에 대한 존중을 인정하는 사회적 성숙이다.

한국의 명절은 지금 '획일적 전통'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전통'으로 진화하고 있다. 추석 차례를 둘러싼 논의는 단순히 의례를 둘러싼 갈등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다원주의 시대로 나아가는 과정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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