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위기 속 '인사시계' 앞당기며 새 판 짜기

| 스마트에프엔 = 이장혁 기자 | 대기업들의 '인사시계'가 유례없이 빨라지고 있다.
8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 SK, 현대차, LG 등 주요 그룹들이 연말 인사를 예년보다 3주가량 앞당기기로 하면서 재계 전반에 '조기 인사 도미노'가 시작됐다. 글로벌 경기 침체, 미·중 통상 마찰, 노란봉투법 시행이라는 3중 악재가 겹치며, 기업들이 예년보다 빠르게 인사 체계를 재정비하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올해 인사는 그야말로 비상경영 수준의 조기 대응"이라며 "내년 경제에 대한 불안이 경영 판단을 앞당기고 있다"고 말했다.
복합 위기와 선제 대응 필요
조기 인사 배경에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 '위기감'.
현대경제연구원은 올해 한국의 성장률을 1.7%에서 0.7%로 대폭 낮췄다. 내수와 수출이 동시에 위축되는, 이른바 '수요 절벽'이 예고되고 있다. 세계은행(WB) 역시 미국의 고관세 정책 여파를 반영해 세계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2.7%에서 2.3%로 낮췄다.
국내 환경도 녹록지 않다. '노란봉투법' 시행으로 기업들은 노사리스크라는 새로운 폭풍을 맞고 있다. 하청노조의 원청 직접교섭이 가능해지고 파업 손해배상 청구가 제한되면서 주한미국상공회의소와 유럽상공회의소가 '기업들의 한국 이탈 가능성'을 공개 경고할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이달 말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는 인사 시점을 더욱 앞당겼다. 최태원 SK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 자격으로 APEC CEO 서밋을 주재하는 등 총수 일정이 집중되면서, 주요 그룹들이 APEC 이후 바로 내년도 경영 전략에 돌입할 수 있도록 '선(先) 인사-후(後) 전략' 구도를 택한 것이다.
각 그룹사 인사 전략
삼성전자는 이재용 회장의 사법 리스크 해소 이후 첫 대규모 인사를 단행한다. 핵심은 '뉴 삼성' 체제 구축이다. 반도체 불황으로 흔들린 DS(디바이스 솔루션) 부문과, AI·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한 DX 부문 개편이 핵심 관전 포인트다. 2021년 3개 부문장을 전원 교체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과감한 세대교체가 단행될 가능성이 높다.
SK그룹은 12월 초 인사 관례를 깨고 11월 초 조기 인사가 유력하다. AI 메모리 호황을 이끈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의 부회장 승진 여부가 최대 관심사다. 반면, 대규모 해킹 사태로 비판받은 유영상 SK텔레콤 대표의 거취가 변수로 떠올랐다. 3년째 '부회장 공백기'가 이어지면서 컨트롤타워 재편이 필요하다는 내부 입김도 커지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12월 인사를 유지할 것으로 보이지만, 트럼프 2기 미국 행정부 출범에 대비한 조기 인사 가능성도 열려 있다. 미국의 관세 리스크 대응,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 미래항공교통(로봇·AAM) 등모빌리티 사업을 주도할 신진 인사 발탁이 예상된다.
LG그룹은 구광모 회장의 위기 인식이 어느 때보다 깊다. 11월 말 인사를 단행해 'ABC전략(AI·바이오·클린테크)' 중심으로 체질을 재정비할 전망이다. 올해 임원 승진 규모는 전년 대비 10% 이상 축소될 것으로 알려졌다. 효율 중심, 성과 중심의 인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성과주의와 조직 슬림화···패러다임 변화
올해 조기 인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신상필벌의 가속화'다. 대부분 그룹이 임원 숫자를 줄이고, 성과 중심의 인사 기조를 강화하고 있다. LG그룹은 임원 승진 규모를 10% 이상 줄였고 SK와 삼성도 '성과 없는 관리자는 없다'는 내부 기류가 확산되고 있다.
기술 전문가와 현장 중심 인재의 발탁도 뚜렷하다. AI,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등 핵심 기술을 중심으로 경영진을 재배치하며, 본업의 경쟁력 강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이런 변화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기업들이 '1월 1일'이라는 형식적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에 따라 수시로 조직을 개편하는 문화가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조기 인사가 위기 극복의 전환점이 될지, 더 큰 어려움의 시작인지는 새로 구성될 경영진들의 역량과 추진력에 달려 있다. 대기업들의 조기 인사는 '속도 경쟁'이 아니다. 위기 상황에서 조직 불확실성을 줄이고 새로운 리더십으로 위기를 돌파하려는 '생존 본능'에 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