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는 그대로, 내수는 붕괴···"고로의 불길이 식어선 안된다"

| 스마트에프엔 = 이장혁 기자 | 대한민국 산업의 상징이던 철강이 거대한 불황의 벽 앞에 섰다. APEC 한미 관세협상이 타결됐지만, 철강에 부과된 50% 관세는 끝내 유지됐다. 국내 건설경기까지 얼어붙으며 내수마저 무너졌다. 업계는 말했다.

"관세보다 무서운 건 내수 붕괴다."

트럼프의 러스트벨트, 철강은 '포로'로 남았다

지난달 29일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한미 양국은 3500억 달러(약 497조원) 규모의 투자 협상을 전격 타결했다. 자동차 관세는 25%에서 15%로 낮아졌고, 반도체·에너지 분야는 보완 합의를 이뤘다. 그러나 철강만은 예외였다. 트럼프 행정부의 상징적 정책인 '러스트벨트 보호관세'는 그대로 남았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월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정상회담장으로 이동하며 대화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월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정상회담장으로 이동하며 대화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영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50% 관세가 유지 중이다. 트럼프 핵심 지지층이 철강노동자들이라, 정치적으로 손대기 어려운 영역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영국이 25% 관세 부과로 다른 나라보다 절반이나 우위에 있다지만 실상은 의미가 없다. 미국으로의 수출 물량이 미미해서다. 한국은 다르다. 관세 완화의 문이 사실상 닫혀버렸다.

대기업은 버티지만, 중소 철강사는 숨통 끊겨

철강업계 관계자는 "대기업들은 수출 다변화로 중소업체에 비해 피해가 제한적"이라 설명했다. 중소업체가 문제다. 미국 시장에만 의존하던 중소 파이프업체, 볼트·너트 생산업체들은 사실상 벼랑 끝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중소 철강사들은 사실상 문 닫을 판이다. 산업부보다 중기부가 더 절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했다.

유럽연합(EU)이 철강 제품에 대한 무관세 쿼터(할당량)를 축소하고 품목 관세를 25%에서 50%로 높이겠다고 예고한 것과 관련해 정부는 지난 10일 총력 대응 방침을 밝혔다. 10월 12일 경기 평택시 평택항에 철강 제품이 쌓여 있다. /사진=연합
유럽연합(EU)이 철강 제품에 대한 무관세 쿼터(할당량)를 축소하고 품목 관세를 25%에서 50%로 높이겠다고 예고한 것과 관련해 정부는 지난 10일 총력 대응 방침을 밝혔다. 10월 12일 경기 평택시 평택항에 철강 제품이 쌓여 있다. /사진=연합

올해 1~9월 중소기업 철강 수출은 전년 대비 7.3% 감소했다. 고관세 여파로 올해 8월까지 철강 중소기업 65곳이 폐업했다. 철강 원자재뿐 아니라 변압기, 볼트, 알루미늄 부품 등 400여개 품목에 50%의 고율 관세가 적용되며 '수출절벽'이 가시화되고 있다.

관세보다 더 큰 적은 내수 침체

철강협회 관계자는 초점을 달리 봤다. 관세보다 더 큰 문제가 국내 건설업 침체라는 것. "건설이 얼어붙으면 철강은 버틸 수 없게 된다." 건설경기 부진은 철강 수요의 붕괴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건설투자는 4년 연속 감소 중이다. 1970년 통계 작성 이래 최장 기간 침체다. 올해 1분기 건설투자 감소율은 13.3%에 달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이 발간한 '2008년 금융위기와 비교한 최근 건설경기 진단과 대응 방안' 보고서에서 최근 국내 건설경기 침체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보다 심각하고 구조적 복합성을 띠고 있어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는 제언이 나왔다. 사진은 5월 서울 마포구 한 공사 현장에서 관계자들이 이동하는 모습. /사진=연합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이 발간한 '2008년 금융위기와 비교한 최근 건설경기 진단과 대응 방안' 보고서에서 최근 국내 건설경기 침체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보다 심각하고 구조적 복합성을 띠고 있어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는 제언이 나왔다. 사진은 5월 서울 마포구 한 공사 현장에서 관계자들이 이동하는 모습. /사진=연합

철강 수요의 31.5%를 차지하는 건설업이 멈추자, 철강 내수도 무너지고 있다. 건설업 취업자 수도 1년 새 14만명이 줄었다.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고용절벽'이다.

"철강이 아니라, 산업 생태계가 죽어가고 있다"는 경고가 현장에서 나오는 이유다.

희망퇴직과 공장 중단···현장에 번지는 침묵

현대제철은 올해만 두 차례 희망퇴직을 단행했다. 포항 2공장은 무기한 휴업, 1공장 중기사업부는 매각 절차에 들어갔다. 매출은 줄었고 영업이익은 간신히 유지됐다. 

동국제강 역시 인천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이 공장은 연간 220만t, 국내 철근 생산의 17%를 책임지는 핵심 공장이다.

언제부터인지 '휴업'이란 단어가 철강업계의 일상이 됐다. 고로의 불길이 식는 순간, 철강의 생명도 꺼진다.

동국제강이 인천공장 압연공장 및 제강공장의 생산을 7월 22일부터 한 달간 중단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동국제강 인천공장에서 철근이 생산되는 모습. /사진=동국제강
동국제강이 인천공장 압연공장 및 제강공장의 생산을 7월 22일부터 한 달간 중단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동국제강 인천공장에서 철근이 생산되는 모습. /사진=동국제강

수출길 막히는 EU, 관세 전면 인상 예고

미국의 벽도 버거운데, 유럽이 또 다른 칼을 빼 들었다. EU는 철강 무관세 쿼터를 절반 가까이 줄이고 초과 물량엔 50% 관세를 물리기로 했다. 한국 철강의 최대 수출지였던 '유럽문'이 닫히는 셈이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이 납부할 관세는 올해만 4000억원. 내년엔 1조원을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산업부 통계에 따르면 10월 전체 수출은 늘었지만, 철강 수출만은 전년 대비 22% 감소했다. 글로벌 수요 둔화, 관세, 공급 과잉이 맞물리며 한국 철강은 추락하고 있다.

철강 살릴 마지막 카드, K스틸법

업계가 기대를 거는 건 'K스틸법'이다. 정식 명칭은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녹색철강기술 전환을 위한 특별법'. 산업 구조 재편, 수요 기반 확충, 녹색 기술 전환, 규제 혁신 등을 포괄한다.

대통령 직속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5년 단위 기본계획을 세우는 내용을 담아냈지만 이 법은 국회 상임위에 묶여 있다. 여야 대립과 정쟁 속에서 '계류'란 단어만 남았다.

9월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K스틸법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연합
9월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K스틸법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연합

포항상공회의소는 지난 9월, K스틸법 조속 통과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철강이 무너지면 지역경제도 함께 무너진다." 절박한 호소에도 K스틸법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덤핑 방지나 금융 지원 같은 단기 처방으론 버티기 어렵다. 공급 과잉, 관세, 건설 침체까지 겹친 구조적 위기상황이다. K스틸법 같은 제도적 해법이 없으면, 한국 철강의 심장이 멈출 수 있다.

산업의 첫 불꽃이던 철강이 식어가고 있다. 관세는 정치 산물로 남았고, 내수는 얼어붙었다. 남은 건 정부가 불씨를 다시 지필 수 있느냐다. 철강업계 관계자의 마지막 말이 멤돈다.

"철강이 무너지면 산업도, 도시도, 일자리도 함께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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