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한국, 같은 시간대의 두 조선소가 만드는 새로운 한·미동맹

| 스마트에프엔 = 이장혁 기자 | 한국과 미국이 원자력추진잠수함(이하 원잠) 건조를 두고 맞서는 듯한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한국은 국내 건조를 밀어붙이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필라델피아 한화 필리조선소 건조를 지목했다. 그러나 최근 부상한 '동시 건조 모델'은 이 대립을 단번에 무너뜨린다.
미국은 필리조선소에서 버지니아급을, 한국은 국내에서 K-원잠을 각각 건조하되, 기술·공정·자재를 상호 연동하는 방식이다.
이 전략은 타협이 아니다. 양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이해가 교차하는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
미국의 절박함···"만들 조선소가 없다"
현재 미국의 원잠은 코네티컷의 일렉트릭보트와 버지니아의 뉴포트뉴스 두 곳에서 건조된다. 문제는 생산 속도가 년에 1.1~1.2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 해군 목표(1.5척)에도 못 미친다. 이 와중에 미국은 버지니아급 16척, 호주 오커스(AUKUS) 물량, 콜롬비아급 전략핵잠수함까지 동시에 건조해야 한다.
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미 해군은 2028년까지 생산량을 3척으로 늘리겠다고 하지만, 숙련 인력 부족·설비 포화·예산 제약이 벽처럼 가로막고 있다. 중국은 이미 연간 4~5척을 찍어낸다. 생산 속도만 놓고 보면 미국의 4배다.
트럼프 행정부가 필라델피아를 '해군 건조 허브'로 만들겠다고 나선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 절망적인 병목을 해소할 한 축이 필리조선소인 이유다.

한화의 7조 투자, MASGA 프로젝트의 성분
한화는 필리조선소에 50억달러(약 7조원)를 투입해 도크 2개와 12만평 규모의 블록 생산기지를 신설키로 했다. 마스가(MASGA) 프로젝트 아래 조성된 1500억달러 조선협력펀드도 힘을 보탤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필리조선소를 미국 동부 산업 재건의 상징으로 삼으려 한다.
"미국의 잠수함이 한국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이 구상은 미국이 '기술 패권'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오래된 원칙을 스스로 흔드는 조치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의미다.
동시 건조 모델은 명확하다. 필리조선소에서 미국의 버지니아급을, 국내 조선소에서 한국형 K-원잠을 동시에 건조한다.
이 경우, 미국은 긴급한 건조 수요를 채우고 한국은 원자로 통합·고정밀 선체 가공·품질관리 등 핵심 기술을 습득하며 양국은 군사기밀을 철저히 분리한 상태에서 실질 협력을 실현할 수 있다.
미국의 기술 통제 불안도 해소된다. 필리조선소는 미국 영토 내에 있으며, 국제무기거래규정(ITAR) 하에 관리된다. 한국은 자국 내에서 독자형 K-원잠을 완성해 국방 자주권을 확보한다. 결과적으로 양국은 상호 보완적 동맹 구조를 갖게 된다.

트럼프의 셈···경제·전략 두 마리 토끼
필리조선소의 원잠 건조는 트럼프의 핵심 공약인 '조선업 부흥'을 현실로 만든다. 필라델피아 일대가 고용·세수·기술 산업이 동시에 살아나는 것이다. 한화가 투입하는 첨단 스마트야드와 자동화 설비는 미국 조선산업의 '21세기형 르네상스'를 열 수 있다.
전략적으로도 뚜렷하다. 필리조선소가 가동되면, 미국은 연간 3척 이상의 버지니아급 생산 능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는 오커스(AUKUS) 공급 일정의 병목을 해소하고, 중국의 4~5척 생산 속도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다.
한국의 득 ···기술 주권과 리스크 분산
한국에게 동시 건조는 기술적·재정적·정치적 세 마리 토끼를 잡는 전략이다.
필리조선소의 건조 과정에 한국 기술진이 참여하면서 미국식 원자로 통합, 고정밀 용접, 방사선 차폐 같은 고급 기술을 체득할 수 있다. 이는 K-원잠의 완성도와 안정성을 대폭 높인다.
또 MASGA 펀드를 통해 필리조선소 투자분을 상계 처리하면, 국내 원잠 건조에 필요한 설비비용을 상당 부분 절감할 수 있다. 예산 리스크가 줄고 일정도 단축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모델은 정치적 명분을 갖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서 건조됐다"는 성과를 가져가고, 이재명 대통령은 "국내 독자 건조를 실현했다"는 자주국방의 명분을 확보한다.
서로의 정치적 필요를 정확히 채워주는 계산이다.
산업 생태계 확장···거제에서 필라델피아까지
필리조선소 건조가 본격화되면, 부산·경남(거제) 조선소들은 모듈·블록 생산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된다.
한화오션의 함정 유지보수(MRO) 사업처럼, 협력업체 네트워크가 필리조선소 공급망으로 연결되는 구조다. 이는 국내 중소 조선소의 기술 고도화와 국제 방산시장 진입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 조선 산업의 생태계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변수도 있다. 현행 한미원자력협정은 한국이 군사용 저농축 우라늄(20~25%)을 사용할 수 없게 규정한다. 따라서 협정 개정이 선결 과제다.
이는 미국 국무부·에너지부·IAEA·NPT 등 다층적 협의가 필요하지만, 양국 정부가 정치적 결단을 내리면 불가능한 과제는 아니다.
필리조선소의 방산업체 지정, 국제무기거래규정(ITAR) 및 미국방부사이버보안성숙도인증(CMMC) 등도 병행돼야 한다. 하지만 버지니아급 실질 건조가 개시되면 이 절차는 빠르게 추진될 가능성이 크다.
두 바다, 한 전략
원잠 건조를 꼭 '국내 vs 미국'의 이분법으로 논할 필요가 있을까. 필리조선소와 거제가 두 개의 엔진처럼 돌아가며, 한쪽은 미국의 해양 패권을 지탱하고 다른 한쪽은 한국의 자주 국방을 완성한다.
미국은 조선업 부흥과 인도·태평양 전략의 안정성을 얻고 한국은 기술 자립과 글로벌 원잠 생태계 진입이라는 실질적 성과를 얻는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적 실리와 한국 정부의 전략적 명분이 맞물리는 순간, '한·미 동시 건조 모델'은 아이디어에서 현실의 시나리오로 격상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