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만든 항공우주산업의 태생적 운명
"비행기는 기술로 뜨지만, 산업은 사람으로 난다." 어느 나라 하늘은 기술보다 두텁고, 어느 나라 하늘은 정치보다 낮다. 그리고 어떤 나라에선 하늘을 나는 일조차 ‘국가의 일’로 여겨진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늘 그 중간 어디쯤에 서 있었다. 국가의 명령으로 태어났고 정권의 손에 길러졌으며 산업의 무게와 군(軍)의 현실 사이를 오가며 날개를 펴야 했다. 기술은 전방으로 나아갔지만, 조직은 후방에서 정비됐고, 사람은 그 경계에서 흔들렸다. 정권의 풍향계에 따라 교체된 CEO들, 정치와 경영의 어긋남 속에서도 묵묵히 설계도를 그리고 시험비행에 나섰던 기술자들, KF-21이라는 기념비적 프로젝트를 수행한 수많은 무명용사가 있었다.
[글 싣는 순서]
①비행역학보다 정무감각?
②고도(高度)의 비행, 저도(低度)의 경영
③정권의 고도계를 넘어, 하늘의 고도로

| 스마트에프엔 = 이장혁 기자 | 국가가 필요해서 만든 기업은, 국가의 의지만큼 날 수 있을까.
사천. 경상남도 끝자락, 흐르듯 이어지는 바다와 낮게 떠 있는 비행기 그림자. 그 아래 자리한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언제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존재해 왔다. 그것은 자유로운 날갯짓이라기보다 누군가가 정해준 궤도를 따라 날아가는 고정익처럼 보였다. KAI는 항공의 역사이기 이전에 대한민국이 만들어낸 창조물이었다.

IMF가 만든 '정치적 기업'
1997년 외환위기. 흔히들 '금모으기'를 기억하지만 정부는 기업부터 정리해갔다. 이른바 '빅딜'. 부실기업을 정리하고 업종을 전문화하는 방식이었다. 삼성항공우주산업, 현대우주항공, 대우중공업의 항공 부문을 떼어내 한데 모은 것이 지금의 KAI다.
국민의정부는 항공산업의 시작점이라 했지만 본질은 위기타개책이었다. 창립은 1999년 10월. 형태는 민간기업이었지만 대주주는 국책은행이었고 CEO는 정권이 내리꽂았다. KAI의 시작은 이랬다. 문제는 국가의 필요가 바뀔 때마다 KAI의 운명도 흔들린 데 있다.

첫 CEO는 임인택. 행시 출신으로 교통부장관을 지낸 전형적인 관료였다. 바통을 이어받은 길형보 사장도 육사22기.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이어진 사장들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산업자원부, 통상산업부, 감사원 등 그들의 커리어는 국가행정이었지 항공은 아니었다.

비행역학보다 정무감각이 좌우한 경영
KAI는 태생부터 기술집약적 기업이었다. 한국형 기본훈련기 KT-1, 초음속고등훈련기 T-50, 국산 공격헬기 KUH-1 수리온, 소형무장헬기 LAH까지. 공군이 쓰는 주요 플랫폼 상당수가 KAI의 손을 거쳤지만 수리온을 설계한 연구원, KF-21의 엔지니어들은 드러나지 않았다. 언론의 헤드라인에 오른 것은 언제나 정권이 임명한 사장이었다.
한국수출입은행이 최대주주인 구조에서 정부 입김이 클 수밖에 없다. CEO는 능력자보다 충성도 높은 인사로 선택됐고 때론 고위공직자들의 종착지가 됐다.

3대 정해주 사장은 통상산업부장관 출신으로, 총선 낙선 후 사장에 취임했다. 항공과는 무관한 경력이었지만 시대의 인맥이 그를 KAI 수장으로 세웠다. 6대 김조원 사장 역시 감사원 출신으로 방산업계 경력은 전무했다. 그들은 정책의 방향엔 민감했지만, '항공의 언어'는 잘 몰랐다.
'하늘을 나는 기계'를 만들면서도, '지상에서의 정치 역학'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회보다는 청와대, 품질보다 인사 라인. 경영은 비행역학보다 정무감각에 치우치면서 기술력보다 '인사력'으로 이야기되는 기업이 됐다. 역설적이게도 하늘에 가까운 기술이 지상에서 발목을 잡히는 순간이 많았다.
'하늘에 남긴 흔적들'···KAI는 비상(飛上)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KAI는 계속 하늘을 내달렸다. KT-1이 인도네시아로 수출되고, T-50이 태국과 이라크에 납품되며, FA-50이 필리핀과 폴란드까지 뻗어나갈 때 그것은 국방 수출 이상의 의미를 담았다. 우리 손으로 조립한 비행기가 해외로 날아가는 장면은 대한민국 산업사의 진보를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2022년, 국산 전투기 KF-21 보라매가 첫 시험비행에 성공했다. 이듬해 6호기까지 시제기가 모두 하늘을 뚫고 떠올랐다. 비행은 중력을 이겨내는 일이다. 기술과 조직, 돈과 정치, 그 모든 것이 땅에 붙들고자 할 때 뜨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역사가 됐다.
KAI는 상장사이고, 경영 효율을 따져야 하는 기업이지만 그 프로젝트들은 민간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국책의 무게'를 떠안고 있다. 수리온, 보라매, 다목적 수송기까지. 국방의 미래를 책임지면서도 그 책임은 정치적 부담으로 되돌아왔다.
KAI는 비행기만 만드는 기업이 아니다. 국가가 스스로 만든 산업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KAI를 보는 시선이 성공과 실패에 머물 수 없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