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날았지만, 경영은 날지 못했다
"비행기는 기술로 뜨지만, 산업은 사람으로 난다." 어느 나라 하늘은 기술보다 두텁고, 어느 나라 하늘은 정치보다 낮다. 그리고 어떤 나라에선 하늘을 나는 일조차 ‘국가의 일’로 여겨진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늘 그 중간 어디쯤에 서 있었다. 국가의 명령으로 태어났고 정권의 손에 길러졌으며 산업의 무게와 군(軍)의 현실 사이를 오가며 날개를 펴야 했다. 기술은 전방으로 나아갔지만, 조직은 후방에서 정비됐고, 사람은 그 경계에서 흔들렸다. 정권의 풍향계에 따라 교체된 CEO들, 정치와 경영의 어긋남 속에서도 묵묵히 설계도를 그리고 시험비행에 나섰던 기술자들, KF-21이라는 기념비적 프로젝트를 수행한 수많은 무명용사가 있었다.
[글 싣는 순서]
①비행역학보다 정무감각?
②고도(高度)의 비행, 저도(低度)의 경영
③정권의 고도계를 넘어, 하늘의 고도로

| 스마트에프엔 = 이장혁 기자 | 한 기업의 비상(飛上)은 단지 기술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비행을 지탱하는 것은 사람이고, 제도이며, 신뢰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비행체를 만드는 기업이지만, 정작 그 자신은 수차례의 비틀거림 속에서도 공중에서 완전히 균형을 잡지 못한 적이 많았다. KF-21 보라매로 대표되는 기술의 고도는 분명 높아졌지만, 그에 어울리는 경영의 저도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 있다.
기술은 날았지만 경영은 날지 못했다
기술력보다 KAI를 흔든 것은 언제나 사람이었다. 그중 CEO 인사는 KAI를 좌우하는 가장 민감한 변수였다. 관료 출신이 대다수였던 CEO 라인업은 정권 교체기마다 낙하산 논란을 불렀고 KAI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훼손시키는 원인이 됐다.

5대 CEO 하성용 사장의 구속은 그 절정을 보여줬다. 2017년 그는 수리온 헬기, T-50 고등훈련기 같은 주요 무기 체계의 원가 부풀리기와 회계 비리, 채용 비리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재판부는 일부 횡령과 채용비리를 유죄로 인정했고 이 사건은 KAI의 조직 문화를 뒤흔들었다.
수차례 반복된 CEO 리스크는 경영의 연속성과 신뢰를 훼손했고 '정권의 사람'이 '기술의 조직'을 이끈다는 비판은 내부 구성원들의 자긍심마저 훼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경영 혼란 속에서도 KAI의 기술은 진화해왔다. KT-1 훈련기, T-50 계열 항공기, FA-50 경공격기, KUH-1 수리온 기동헬기, KF-21 보라매까지. KAI는 20여 년 만에 대한민국을 '항공기 개발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기술적 성취는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T-50은 인도네시아, 이라크, 태국으로, FA-50은 필리핀, 폴란드, 말레이시아에 수출되며 K방산의 핵심 아이콘이 되었고 KF-21은 초음속 비행 시험 성공과 양산 계약까지 이끌며 독자 전투기 개발에 한 발 더 다가섰다.

'하드웨어'의 비행에 비해 '소프트웨어' 즉, 경영 시스템과 조직 문화는 여전히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KF-21 기술 유출 의혹, 협력업체와의 갈등, 반복되는 민영화 논쟁, 계약직 인력의 불안정 고용 등은 기술적 비약의 반대편에서 KAI가 직면한 뿌리 깊은 문제들이었다.
"착륙 대신 이륙을 위한 퇴장"
7월 강구영 사장이 임기를 3개월 앞두고 사퇴했다는 소식은 또 한 번 KAI의 '리더십 공백'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렸다.
강 사장은 2022년 9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KAI 사장으로 취임한 인물이다. 공군사관학교 30기 출신으로 공군 제5전술공수비행단장, 공군 참모차장, 합동참모본부 군사지원본부장 등을 역임한 정통 군 출신이다. 국내 1세대 시험비행 조종사이자, KT-1과 T-50 개발 당시 직접 조종간을 잡았던 인물이다.

정무적으론 대선 때 윤석열 캠프의 '국민과 함께하는 국방포럼'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그의 취임은 기술 기반 리더십에 대한 기대와 동시에 또 다른 정권 코드 인사라는 논란을 동시에 낳았다.
강 사장은 보란듯 임기 중 FA-50 필리핀 수출 확대, KF-21 보라매 양산 본계약 체결 등 핵심 사업들을 안정적으로 성사시켰고 내부에서는 "조직 내 전문성을 어느 정도 되살린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2025년 6월 4일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자 사직서를 제출하고 7월 1일을 끝으로 임기 중 사퇴했다. 공식 사유는 '계약 마무리 후 안정적 리더십 교체를 위한 용퇴'였지만, 업계 안팎에서는 정권 재편 흐름과 연관된 '조기 정리'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KAI는 차기 CEO 선임 전까지 사내이사인 차재병 고정익사업부문장이 사장 직무를 대행한다. 동시에 업계에서는 차기 사장으로 강은호 전 방위사업청장, 류광수 전 KAI 부사장 등이 거론되고 있다.
또다시 찾아온 수장 교체의 시간은 KAI가 여전히 정권 교체와 함께 흔들리는 인사 기업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다음 비행은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
KAI는 지금도 업그레이드 중이다. KF-21 이후의 스텔스형 전투기 개량, 다목적 국산 수송기(범고래), 위성 기술과 항공정비산업(MRO) 확대까지. 외형적 사업은 분명히 성장하고 있다. KAI는 국방 주권과 직결된 상징이고 세계시장에서 한국 방위산업의 자존심이 걸린 이름이다.
하지만 '진짜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기술은 더 빨리 날아도 좋다. 그러나 그 기술을 운용하는 사람, 그 기술을 꾸려가는 조직이 흔들리면 아무리 좋은 항공기라도 이륙하기 어렵다.
KAI가 진짜 준비해야 할 것은 새로운 CEO가 아니라, '정권 바깥'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시스템이다.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조직의 철학이 이어지는 구조. 그때야 비로소 KAI는 기술도 경영도 함께 날 수 있는 기업이 될 것이다.
그 비행의 고도는, 더는 정권의 고도계에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