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의 다음 10년···핵심기술 내재화와 미래기술 선점
"비행기는 기술로 뜨지만, 산업은 사람으로 난다." 어느 나라 하늘은 기술보다 두텁고, 어느 나라 하늘은 정치보다 낮다. 그리고 어떤 나라에선 하늘을 나는 일조차 ‘국가의 일’로 여겨진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늘 그 중간 어디쯤에 서 있었다. 국가의 명령으로 태어났고 정권의 손에 길러졌으며 산업의 무게와 군(軍)의 현실 사이를 오가며 날개를 펴야 했다. 기술은 전방으로 나아갔지만, 조직은 후방에서 정비됐고, 사람은 그 경계에서 흔들렸다. 정권의 풍향계에 따라 교체된 CEO들, 정치와 경영의 어긋남 속에서도 묵묵히 설계도를 그리고 시험비행에 나섰던 기술자들, KF-21이라는 기념비적 프로젝트를 수행한 수많은 무명용사가 있었다.
[글 싣는 순서]
①비행역학보다 정무감각?
②고도(高度)의 비행, 저도(低度)의 경영
③정권의 고도계를 넘어, 하늘의 고도로

| 스마트에프엔 = 이장혁 기자 | 사천 하늘을 배경으로 한 은빛 동체가 활주로를 박차고 올랐다. 바퀴가 채 접히기도 전에 엔진음은 쇄도하는 금속의 심장박동처럼 울려 퍼졌다. 그 비행기 옆면에는 'KAI'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한국항공우주산업. 지난 25년간 대한민국 하늘과 국산 항공기의 자존심을 지켜온 이름이다.

KAI의 역사는 국가의 필요에서 시작됐다. IMF 외환위기의 한복판, 삼성·현대·대우의 항공 부문이 통합돼 하나의 기업이 만들어졌다. 위기 속 통합은 필연이었지만, 그 이후의 경영 키는 늘 정치권이 쥐었다. 정권이 바뀌면 CEO가 바뀌고 전략이 뒤집혔다. 데이터를 쌓아온 기술자들의 경험과 축적된 전략도, 새 권력의 우선순위 앞에서는 종종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런 환경에서도 KAI는 KT-1 기본훈련기, T-50 고등훈련기, FA-50 경공격기, KF-21 보라매 등 굵직한 성과를 쌓았다. 그러나 현장의 목소리는 냉정하다. "정권이 바뀌면 부품 발주 우선순위까지 바뀐다. 기술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지만, 체계는 하루 만에 무너질 수 있다." 사천 조립동에서 20년 넘게 일해온 한 근로자의 일성이다.

KAI는 지금 두 겹의 바람 속에 서 있다. 하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불어오는 '정치의 바람', 다른 하나는 세계 방산 시장에서 몰아치는 '경쟁의 바람'이다. 전자는 늘 조종간을 빼앗아갔고, 후자는 그 빈틈을 파고들었다. 방향을 바꾸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경쟁자들은 이미 새로운 활주로를 박차고 떠올랐다.
업계 경쟁사인 현대로템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지난해 괄목할 만한 실적을 냈다. 현대로템은 매출 4조 원에 영업이익이 크게 늘어났다. 수출 확대 및 주력 전차 수출 계약이 성장 동력으로 작용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도 매출이 10조 원을 돌파하며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냈다.
KAI는 매출 하락에도 영업이익은 올라 수익성이 개선됐지만 경쟁사들에 비해 매출 규모와 수출 다변화 측면에서 도약이 필요한 상황이다. 기술력과 수주 잔고를 바탕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 조직의 자립과 글로벌 시장 대응 역량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다.
'정권의 사람'에서 '하늘의 사람'으로
이재명정부의 방산 수출 드라이브는 기회이자 시험대다. 대통령은 방산을 '안보이자 미래 먹거리'라 선언하며, 수출 확대와 인재 양성, 연구개발 투자, 판로 개척까지 전방위 지원을 약속했다. G7 정상회의, 나토 회의, 캐나다 잠수함 협력 논의까지 직접 뛰어다니며 방산을 외교 무대의 전면에 올려놓았다.

국가의 지원이 기업의 자립을 대신할 수는 없다. 외교가 무대의 문은 열어주겠지만, 그 안을 채우는 것은 오롯이 KAI의 몫이다. 몫을 제대로 채우려면 정권 변화와 무관한 지속 가능한 경영 체계가 필수다. 내부 승진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인사 문화, 단기 성과에 흔들리지 않는 장기 전략 같은. 이것이 '하늘의 사람'을 조종간에 앉히는 첫걸음이다.
KAI가 그리는 미래 항로는 부품 조립과 완제기 수출에 머무르지 않는다. KF-21 이후를 겨냥한 스텔스 전투기, 장거리 무인기, 차세대 위성 플랫폼은 청사진이 준비됐다. 개발이 성공하면, 기술은 민간 항공과 우주 산업으로 확대될 수 있다. 세계 우주 발사체 시장, 민간 위성 통신망, 도심항공교통(UAM) 같은 분야가 새로운 활주로다.
해외시장 전략도 변화가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몇몇 동맹국 위주 수출이었다면, 동남아·중남미·중동·아프리카까지 수출 채널을 확대해야 한다. 기체 판매에 그치지 않고 현지 조립·정비·부품 국산화 패키지를 묶어 장기 계약으로 이어가는 방식이다. 그래야 1~2년 실적이 아닌 10년, 20년 먹을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민간형 지배구조와 기술 내재화···세계의 KAI 되어야
세계 방산시장은 속도 경쟁에 놓여있다. 폴란드와 말레이시아는 이미 FA-50 도입을 결정했고, 필리핀은 추가 물량 협상에 들어갔다지만 터키의 TF-X, 인도의 테자스, 일본의 차세대 전투기 프로젝트가 수출 시장을 겨냥해 내달리고 있다. 외교 무대에서 대통령이 아무리 판을 깔아줘도, 제품 경쟁력과 공급 능력이 따라가지 못하면 기회는 손끝에서 흩어진다.
핵심기술 내재화는 생존 조건이다. 엔진, 레이더, 항전장비, 위성체계 같은 기술을 국산화하고 부품 자급률을 높이는 작업 없인 가격과 납기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차세대 에너지 효율 엔진, AI 기반 비행 제어, 초경량 소재 같은 미래 기술도 선점해야 한다.

KAI의 진짜 경쟁자는 정치가 아니다. 속도와 품질이다. 정부 지원은 힘있는 발판이 될 수 있지만, 한 번의 수출이 미래를 보장하진 않는다.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길은 기술력, 신뢰, 지속성을 무기로 스스로 시장을 넓히는 것이다.
정권은 바람의 방향을 바꿀 수 있지만 날개짓의 힘은 내부에서 나온다. '낙하산' 대신 '실력자'를 조종간에 앉히고, 정부의 외교전을 발판 삼아 스스로 시장을 넓힐 수 있을 때, 비로소 KAI의 진짜 이륙이 시작된다. 25년의 역사 끝에서 그 실력자가 조종간을 잡아 정치의 그림자를 뚫고 오르는 날, 이제부터가 진짜 비행임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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