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현대, '장교 전통'으로 병역 이행 솔선수범
이재용 장남 해군 입대 '뉴 노멀' 될까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장남 지호씨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해군 장교로 입대했다. /사진=삼성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장남 지호씨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해군 장교로 입대했다. /사진=삼성

| 스마트에프엔 = 이장혁 기자 |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장남 지호씨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해군 장교로 입대했다.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오랜 시간 한국 사회의 아킬레스건이 되어온 '재벌가 병역' 문제에 새로운 장면을 연출했다는 점에서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국민의 기본 의무인 병역은 수십 년간 재벌가에서 가장 불편한 질문이자 사회적 의혹의 대상이었다. 이번 지호씨의 결정은 '특권을 버리고 책임을 지는 선택'으로 해석되며, 기성 재벌가와 확연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재벌가 병역 이행률, 국민 눈높이 밑돌아

통계는 증명했다. 2011년 연합뉴스가 주요 재벌가 성인 남자 124명을 조사한 결과, 면제율은 35.1%로 일반인(29.3%)보다 높았다. 더 이른 2006년 KBS 조사에선 7대 재벌가 면제율이 33%로 일반인(6.4%)의 다섯 배에 달했다. '돈과 지위가 있으면 군대를 피할 수 있다'는 불신이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배경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사진=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사진=연합뉴스

당시 삼성가(家)는 병역 면제의 중심에 있었다. KBS 조사에 따르면 삼성가의 병역 면제율은 73%에 달했다. 재벌가 평균 면제율보다 2대 더 높았다. 조사 대상 11명 중 8명이 군 복무를 면제받았다. 이건희 선대회장은 공식적으론 병역을 마쳤지만, 장남 이재용 회장은 질병으로 면제됐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희귀병을 이유로, 정용진 신세계 회장도 면제를 받았다. 한솔그룹 3형제는 모두 군대를 면제받았는데 2015년엔 병역 비리 사건까지 터졌다.

구광모 LG회장
구광모 LG회장 /사진=LG

LG가는 어떨까. 구본무 선대회장과 형제인 구본능 회장, 구본준 부회장, 구본식 사장 등은 육군 병장 만기 전역자다. 또 그들의 자녀인 구자엽 LS산전 회장, 구자균 LS산전 부회장, 구자열 LS전선, 구자일 일양화학 회장, 구자철 한성 회장 등도 육군에서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구광모 회장도 산업복무요원으로 병역을 마쳤다. 반면 구본진 전 LG패션 부사장, 구자준 전 LIG손해보험 회장과 그의 장남 구동범, 차남 구동진 등이 군 면제를 받았다. 방산업체 LIG넥스원을 경영하는 구본상 회장은 군 복무를 하지 않았다.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방산기업 오너가 군 경험이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허태수 GS그룹 회장. /사진=GS그룹
허태수 GS그룹 회장. /사진=GS그룹

GS가는 주요 경영진과 직계 가족 중 다수가 신체적 사유와 건강 문제를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허창수 명예회장과 허진수 GS칼텍스 전 회, 허태수 회장 등 주요 계열사 대표들은 군 복무를 마쳤으나 허 명예회장의 장남 허윤홍 GS건설 사장은 제2국민역 판정을 받아 현역 복무를 하지 않았다. 허동수 GS칼텍스 명예회장의 두 아들 중 허세홍 사장 시력 문제로, 허자홍 에이치플러스에코 대표는 질병으로 각각 병역을 면제받았다. 병역 면제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삼양통상 허남각 회장의 장남 허준홍 사장도 손가락 질병을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GS가의 병역 면제 배경에는 주로 건강상의 이유가 자리 잡고 있다.

신동빈 롯데 회장 /사진=롯데
신동빈 롯데 회장 /사진=롯데

롯데는 어떨까. 창업주 가문이 일본 국적을 유지하면서 병역을 피했다. 신동빈 회장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일본 국적을 유지해 병역 기피 의혹을 받았지만 현재는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신 회장의 형인 신동주 일본 롯데 전 부회장도 일본 국적자로 병역이 면제됐다. 신 회장 아들 신유열 부사장은 일본 국적자로 2024년 38세가 되면서 병역의무 연령을 넘어섰다. '국적 선택'이 병역 회피 수단으로 활용된 사례다.

최태원 SK 회장 /사진=SK
최태원 SK 회장 /사진=SK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이 고도근시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 차녀 최민정씨가 2014년 해군 장교로 자원입대해 주목받았지만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과 최재원 SK이노베이션 수석부회장 같은 주요 인물들이 면제를 받아 그룹 전체적으로는 높은 면제율을 보이고 있다.

'가문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모범 사례

모두가 같은 길을 걷지는 않았다. 몇몇 재벌가는 병역 이행을 '가문의 전통'으로 삼았다. 대표적인 곳이 한화와 현대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사진=한화그룹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사진=한화그룹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을 중심으로 한 한화가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공군 장교로 복무하는 것이 가문의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다. 김승연 회장 본인은 물론 동생 김호연 빙그레 회장, 누나 김영혜씨까지공군 장교 출신이다.

김승연 회장의 자녀들도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장남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은 하버드대 졸업 후 2006년 공군 사관후보생 117기로 입대해 소위로 임관, 3년 4개월간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차남 김동원 한화생명 사장도 공군 사관후보생 출신으로 장교 복무를 마쳤다. 3남 김동선씨만 아시안게임 금메달 수상으로 병역이 면제됐을 뿐, 가문 전체가 국방 의무에 충실했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사진=한화그룹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사진=한화그룹

방산업계에서 한화에어로스페이스를 이끌고 있는 김동관 부회장은 "방산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 군 복무 경험이 없다면 자격 미달"이라며 병역 이행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한화그룹의 이러한 전통은 국방산업을 주력으로 하는 기업답게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1월 2024년 현대차그룹 신년회에 참석해 \'한결같고 끊임없는 변화를 통한 지속 성장\'이라는 새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사진=현대차그룹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1월 2024년 현대차그룹 신년회에 참석해 \'한결같고 끊임없는 변화를 통한 지속 성장\'이라는 새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사진=현대차그룹

범현대가 역시 창업주 정주영 명예회장의 가르침에 따라 2세대가 모두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쳤으며, 3세대도 대부분 병역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을 비롯해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ROTC 13기),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 정몽일 현대기업금융 회장 등 2세대 모두가 현역 복무자다.

HD현대 정기선 수석부회장이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MADEX 2025 리셉션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HD현대
HD현대 정기선 수석부회장이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MADEX 2025 리셉션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HD현대

HD현대그룹의 정기선 수석부회장은 2005년 ROTC 43기로 육군 소위 임관 후 제701특공연대에서 복무하고 중위로 전역했다. 아버지 정몽준 이사장과 부자간 ROTC 선후배 관계를 맺으며 HD현대그룹만의 독특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해군 ROTC 후보생들에게 바비큐 특식을 선물하며 격려한 일도 화제가 됐다.

범현대가에서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만 유일하게 담낭절제술로 병역 면제를 받았지만, 이는 당시 의학적 기준에 따른 것으로 현재는 면제 대상이 아니다. 정 명예회장의 직계 3세 11명 중 10명이 병역을 이행해 압도적인 이행률을 보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특권 아닌 더 무거운 책임

재벌가의 병역 이행 여부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곧바로 기업의 신뢰도와 사회적 정당성으로 이어진다. 특히 방산업체나 국가 기간산업을 운영하는 기업일수록 오너 일가의 병역 이행은 피할 수 없는 사회적 의무다.

한화와 현대처럼 병역을 '가문의 의무'로 받아들이는 곳이 있는가 하면, 삼성·롯데처럼 면제율이 높은 곳도 있다. 대조는 뚜렷하다. 그동안 재벌가의 병역은 '특권층의 회피와 변명'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젊은 세대는 다른 선택을 하고 있다. 이재용 회장의 장남 지호씨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면서까지 해군 장교로 입대한 것은 그 변화의 신호탄으로 읽힌다.

2002년 최고의 스타였던 유승준은 병역 회피로 국적을 포기했고, 25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땅을 밟지 못한다. 병역 문제만큼 국민 정서가 단호한 영역은 없다. 재벌가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특권을 누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더 무거운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다. 기업 오너 일가의 병역 이행은 단순한 법적 의무를 넘어, 국민 앞에서 자신들의 권력이 정당한지 입증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계약이다.

삼성가를 비롯한 재벌가의 오랜 병역 논란은 세대 교체의 기로에 서 있다. 병역 면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시대는 끝났고 병역 이행이 기업 승계와 사회적 신뢰의 필수 조건이 될 시대가 열렸다. 지호씨의 선택은 개인의 길이 아니라, 한국 재계가 더 성숙한 사회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을지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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