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승진, 더 큰 책임···정주영의 손자에서 HD현대의 선장으로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MADEX 2025 리셉션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HD현대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MADEX 2025 리셉션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HD현대

| 스마트에프엔 = 이장혁 기자 | 재계 8위 HD현대가 43세 총수 체제로 항로를 바꿨다. 정기선 회장은 부회장 취임 2년 만에 그룹 회장으로 승진하며, 1988년 이후 37년간 이어온 전문경영인 시대를 마감시켰다. 

37년 만의 '오너경영' 복귀···속도의 리더십이 닻을 올리다

1982년생, 연세대 경제학과 출신, 스탠퍼드 MBA, 입사 16년 만의 회장 취임. 그의 이력은 전통 재벌 구조 속에서도 드물게 '실행 중심형 젊은 리더'의 전형을 보여준다. 현장과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 글로벌 컨설팅 경험, 그리고 속도와 기술을 강조하는 리더십.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2025년 9월 전남 영암군 HD현대 삼호조선소에서 주요 생산 설비와 고위험 작업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HD현대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2025년 9월 전남 영암군 HD현대 삼호조선소에서 주요 생산 설비와 고위험 작업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HD현대

속도는 양날의 검이다. 한 재계 관계자의 말은 현실을 정확히 짚는다. 

"결정은 빠르지만, 방향이 틀리면 크게 흔들릴 수 있다." 

폭풍 성장의 이면···'순풍일 때 항해는 쉽다'

정기선 회장 취임 전 3년간 HD현대의 수치는 화려하다. 매출 61조원에서 67조원, 영업이익 2조원에서 3조원, 그리고 조선부문은 영업이익 400% 폭증을 기록했다. HD현대중공업의 2025년 2분기 영업이익률은 11.4%에 달했다. 조선업계 사상 최고 수준이다. 

'성적표'의 절반 이상은 외부 순풍의 결과다. 조선 시황의 초호황, LNG선 수주 급증, 환율 효과 같은 세 가지 요인이 겹치며 '단기 초과이익'을 만든 셈이다. 진짜 시험은 경기 하강기다. 선박 발주가 줄고 철강 원가가 오를 때, HD현대가 수익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정기선의 경영수완은 그 순간 검증된다. '젊은 리더십'의 약점은 경험 부족이 아니라, 위기에서의 냉정함이다.

HD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 /사진=HD현대중공업
HD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 /사진=HD현대중공업

오션 트랜스포메이션···거대한 비전, 냉정한 현실

정기선은 CES 2023 무대에서 HD현대의 미래 비전, '오션 트랜스포메이션(Ocean Transformation)'을 발표했다. 

"인류의 미래는 바다에 있다. HD현대는 바다 위에서 새로운 문명을 설계할 것이다." 

CES 2023 HD 현대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정기선 회장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
CES 2023 HD 현대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정기선 회장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

이 선언은 자체로 대담했고 산업적으로도 설득력이 있었다. 오션모빌리티(자율운항·친환경 선박), 오션에너지(해상풍력·SMR), 오션와이즈(해양 데이터 플랫폼), 오션라이프(해양 레저·모빌리티 확장). HD현대가 추구하는 네 개의 축은 바다를 새로운 경제권으로 확장하는 전략이었다. 

일각에선 실행 속도에 의문을 제기했다. "해상풍력은 아직 경제성이 불안정하고 SMR은 규제 리스크가 크다"며 "비전보다 실행 시점이 앞서 있다"는 의견이다. 비전이 미래를 그리는 언어라면, 투자는 현재의 현실을 증명해야 한다. HD현대는 아직 그 경계선 위에 서 있다.

MASGA 프로젝트···한미 '조선동맹'의 정치경제학

정기선이 '세계 리더십'의 첫 시험대에 오른 곳은 미국이다. 'MASGA(Make America Shipbuilding Great Again)' 미국 조선업 재건 프로젝트의 핵심 파트너로 HD현대가 참여했다. 미국 상무부, 산업은행, 서버러스 캐피탈과 함께 수십억 달러 규모의 공동투자 프로그램을 출범시킨 정기선은 "한미 동맹을 조선산업 협력으로 확장하겠다"고 선언했다.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2025년 8월 '한미 조선산업 공동 투자 프로그램 조성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후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사진=HD현대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2025년 8월 '한미 조선산업 공동 투자 프로그램 조성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후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사진=HD현대

이 프로젝트는 한미 경제 협력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정치적 리스크의 불씨기도 하다. 미국의 보호무역 기조, 노조 리스크, 기술 이전 문제 등은 언제든 협력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MASGA'는 정기선의 리더십이 외교·산업·정치를 넘나드는 '복합 경영'의 시험대가 되는 상징적 사업이다.

합병의 그림자···'책임경영'으로 돌파

HD현대는 조선(HD현대중공업+HD현대미포), 건설기계(HD현대건설기계+HD현대인프라코어) 두 축의 대형 합병을 연속 추진 중이다.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는 12월, HD현대건설기계와 HD현대인프라코어가 이듬해 1월에 각각 조선·건설기계 단일 법인으로 출범할 예정이다.

공식 설명은 '시너지 극대화, 경쟁력 강화'다. 하지만 내부에선 '속도전의 그림자'란 말이 돈다. 합병은 숫자보다 사람이 어렵다. 문화, 조직, 기술, 노조 이 네 가지가 충돌하면 효율보다 혼란이 앞선다.

정기선은 HD현대사이트솔루션 공동대표를 겸임하며 건설기계 부문의 부진을 수습하겠다고 나섰다. 책임경영의 신호이자, 동시에 리스크를 직접 떠안겠다는 선언이다.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2024년 1월 'CES 2024'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HD현대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2024년 1월 'CES 2024'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HD현대

성장과 희생, 좁혀지지 않는 간극

화려한 성장 곡선 뒤에는 '노동자의 희생'이 있었다. 수년간 HD현대 계열사는 반복적인 산업재해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구조적 문제를 드러냈다.

2024년 한 해 동안만 HD현대중공업, HD현대미포조선, HD현대삼호중공업에서 사망사고가 잇따랐다. 2월 철제 블록에 끼여 숨진 하청노동자, 10월 메탄올 탱크에서 질식사한 노동자, 12월 도크 아래로 추락한 원청 근로자와 혼자 잠수작업 중 숨진 22세 하청직원. 2025년에도 개구부 추락으로 또 한 명이 사망했다. 안전 규정 위반, 인원 배치 미흡, 통신장비 부재. 패턴은 동일했다.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숫자다. 2020년부터 2024년 8월까지 HD현대중공업의 산재 승인 건수는 2937건. 조선업계 전체의 절반 이상(50.2%)을 차지했다. 2023년에는 산재 신청만 1073건으로 업계 유일의 1000건 초과 기록. 이쯤 되면 '사고'가 아니라 운영 시스템 '실패'에 가깝다.

책임의 무게도 가벼웠다. 2019~2020년 발생한 4건의 사망사고에 대한 1심 판결은 법인 벌금 5000만원, 대표이사 2000만원. 항소심에서도 형량은 그대로였다. 노동계가 "솜방망이 처벌 이후에도 사람이 죽는다"고 비판한 이유다.

HD현대삼호가 전 직원 대상으로 제작·배포한 '안전수칙 포켓북' /사진=HD현대삼호
HD현대삼호가 전 직원 대상으로 제작·배포한 '안전수칙 포켓북' /사진=HD현대삼호

2024년 울산의 중대재해 20건 중 상당수가 HD현대 계열사에서 나왔고 민주노총은 HD현대중공업·HD현대미포를 '2025년 울산 최악의 살인기업'으로 꼽았다. 정기선이 강조한 "안전은 기술보다 앞선 경쟁력" 말도 현장에선 잘 먹히지 않는다.

조선업 특유의 하청 구조가 문제다. HD현대 조선소 노동자의 70% 이상이 하청직이고 다단계 하도급 확산과 비숙련 인력의 급투입은 사고 가능성을 극대화한다. 원청은 서류상 관리 책임을 지지만, 실질적 통제권은 빠져 있다. 비용 절감과 생산 일정이 안전보다 앞선 모순(矛盾)이다.

'기술보다 안전'···40대 총수 시대의 리스크와 가능성

HD현대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2025년 7월 '절대 불가 사고' 9가지를 지정하고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는 새로운 안전보건 경영체계를 도입했다. 9월에는 3년간 3조5000억원 규모의 조선소 안전 투자를 발표했다. 그러나 발표 후에도 사망 사고가 이어졌다. 비전과 선언은 있었지만, 시스템과 문화는 바뀌지 않았다.

결국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세계 1위 조선업' 타이틀을 지키려면, 기반이 되는 '노동의 존엄'을 먼저 복원해야 한다. 젊은 총수가 이끄는 새로운 HD현대가 변화를 증명하려면, 혁신보다 먼저 생명을 지키는 게 우선이다. 

정기선호(號)는 이제 막 출항했다. 그가 안정적인 항로로 키를 잡을지, 폭풍 속으로 향할지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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