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항공 보상 체계가 '있기만 한 제도'에서 '작동하는 제도'로 바뀌어야 한다. 이제 필요한 건 명확한 규칙과 그 규칙을 지키게 만드는 의지다. /사진=연합뉴스
한국의 항공 보상 체계가 '있기만 한 제도'에서 '작동하는 제도'로 바뀌어야 한다. 이제 필요한 건 명확한 규칙과 그 규칙을 지키게 만드는 의지다. /사진=연합뉴스

| 스마트에프엔 = 김종훈 기자 | 한국의 항공 보상 체계는 시작부터 기울어져 있다. 면책 사유는 넓고 배상액은 운임에 연동돼 작아지기 쉬우며, 집행력도 약하다.

같은 지연·결항이라도 미국이나 EU에서는 승객이 얼마를 어떻게 받을지 비교적 명확하다. 한국에서는 기준이 있음에도 예외가 넓어 현금성 보상으로 이어지지 않는 일이 잦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규정은 있는데 보상 받기는 어렵다"는 체감이 쌓인다.

현장에선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 공항 카운터에서 돌아오는 답변은 대개 '앞선 항공편 지연에 따른 문제'라는 문구로 정리되고 이 한 줄이 면책의 만능열쇠처럼 작동한다. 바우처 한 장, 대체편 안내로 사태가 마무리되면 승객 손에 남는 건 영수증뿐이다. 국제선에서 3~4시간 넘게 지연돼도 환급 기준이 운임의 일부라 특가 항공권을 산 승객일수록 체감 보상은 더 작아진다. 규정은 존재하지만 예외의 울타리가 더 커서 규정은 안내문 이상이 되지 못한다.

해외는 다르다. EU는 '항공여객권리 규정(EU261)'으로 3시간 이상 지연 시 운항거리 구간별로 250~600유로를 보상하도록 못 박았다. 면책은 천재지변 같은 특수한 상황으로 좁혀 둔다. 기체에 일반적 기술 결함은 면책이 아니라는 판례 사례가 쌓여있다. 좌석을 낮은 등급으로 강등하면 운임의 30~75%를 환불하도록 한 조항도 명시돼 있다.

미국은 지연에 대한 정액 보상 의무는 없지만, 강제 탑승거부(오버부킹)에는 운임의 200~400%룰 현금 보상하도록 의무화했다. 미 교통부(DOT)는 2024년 확정된 자동 환불 규칙으로 항공사에 의해 취소 및 중대한 변경이 발생하면 조건 없이 환불을 진행하도록 소비자권을 강화했다. EU는 정액·의무 보상, 미국은 환불과 오버부킹 현금 보상의 틀이 선명하다. 한국은 운임연동 보상에 면책 사유가 넓게 인정되는 구조라 보상이 약할 수밖에 없다.

차이는 세 곳에서 분명해진다. 첫 번째, 면책의 범위다. EU가 특수한 사정만 면책으로 본다면 한국은 접속 지연·공항 사정·안전정비 등 사유가 넓게 형성돼 있다. 같은 상황이라도 승객이 보상에서 배제될 여지가 크다. 두 번째, 보상액의 형식이다. EU의 정액 보상은 운임이 저렴해도 최소 보상선을 담보하지만 한국은 운임 비율이라 특가일수록 보상 체감이 작아진다. 세 번째, 강제성이다. EU261은 위반 시 제재가 뒤따르는 공법 규정이지만 한국의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은 고시에 머물러 집행력이 약하다. 제도는 있으나 실제로 작동하느냐의 질문에서 한국이 뒤처지는 지점이다.

좌석 파손 문제도 늘 애매하다. 한국·EU·미국 모두 좌석 파손 자체에 대한 정액 규정은 없다. 지연·결항 같은 대규모 운송 실패에 초점을 맞춘 틀에서 비롯된 한계다. 그래서 좌석 등 개별 서비스 미이행은 항공사 재량인 마일리지, 바우처, 부분 환불 등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좌석 등급이 실제로 낮아졌다면 EU가 정한 등급 강등 환불을 근거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국제선에서 큰 불편과 비용이 발생했다면 몬트리올 협약의 손해배상 틀을 활용할 여지도 있다. 핵심은 단순 불편이 아니라 '계약된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했다'는 점을 증거로 입증하는 일이다.

소비자가 보상을 받기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면서도 집요해야 한다. 공항에서 지연·결항 사유가 적힌 공식 문서를 반드시 받아두고, 좌석 파손은 사진·영상으로 기록해 승무원 기록에 반영됐는지 확인한다. 식사·숙박·교통 등 추가 지출은 영수증을 모아 손해 항목별로 청구한다.

국내선·국제선 지연은 국내 분쟁해결기준에 따른 환급을 요구하고 큰 지연 및 손해는 몬트리올 협약을 근거로 들어야한다. 좌석 강등이나 핵심 기능 고장이라면 서비스 미이행 논리를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항공사와의 협의가 성립되지 않으면 한국소비자원·공정위 분쟁조정으로 절차를 옮긴다. 현장에서 바우처로 타협하기보다, 사후에 서면으로 정리해 요구하는 편이 결과가 낫다.

해법은 제도다. 면책 사유를 EU처럼 특수한 상황으로 좁혀야 한다. 지연과 같은 운영 리스크는 원칙적으로 비면책에서 제외해야 한다. 지연 시간과 거리에 따른 정액 보상을 도입해 최소 보상선을 보장하고 고시 수준의 기준을 법·행정 규제로 상향해 미이행 시 과태료 등 제재를 붙여야 한다. 신속·전문 분쟁조정을 위한 전담기구를 세우고 항공사별 지연 통계와 보상 이행률을 공개해 시장의 감시를 제도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예외를 줄이고, 금액을 고정하며, 집행을 강제하는 것. 이 세 가지가 핵심이다.

공정은 규정에서 태어나지만 신뢰는 집행에서 완성된다. 같은 하늘을 날아도 규칙이 다르면 승객의 권리는 불투명해진다. 국내도 항공 보상 체계가 '있기만 한 제도'에서 '작동하는 제도'로 바뀌어야 한다. 필요한 건 명확한 규칙과 그것을 지키는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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