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열 호반그룹 회장과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김상열 호반그룹 회장과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이 다시 경영권 분쟁의 격랑에 빠져들었다. 이번엔 '조현아의 난'이 아니라 '호반의 기습'이다. 호반그룹이 한진칼 지분을 18.46%까지 확보하며 조용히 2대 주주로 올라섰고 시장은 시끄럽게 반응했다.

호반은 "단순 투자일 뿐"이라 선을 그었다. 그러나 한진은 이 침묵을 '의심'으로 듣고 있다. 조원태 회장이 신뢰를 기반으로 삼고 있는 산업은행의 선택이, 이번에도 승부를 가를 결정적 '손'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단순 투자? 한진이 믿지 못하는 이유

5월 12일. 호반건설은 한진칼 지분을 추가 매입했다고 공시했다. 순식간에 주가는 이틀 연속 상한가를 찍었다. 단순 투자였다면 이토록 민감하게 요동쳤을 리 없다. 시장은 단순한 지분 확대가 아닌 '신호탄'으로 해석했다.

호반은 말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의 통합 시너지, 그래서 투자했다." 

그러나 주총에서 이사 보수한도 인상안에 반대표를 던진 기록은 '침묵하는 투자자'의 자세와는 거리가 멀다. 의결권을 행사한 투자자, 그것도 경영 사안에 반대 입장을 낸 투자자는 대부분 그다음 카드를 준비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진그룹도 알고 있다. 조 회장 일가의 한진칼 지분은 30.5% 수준. 여기엔 산업은행의 10.58%가 포함돼 있다. 순수한 오너 일가 지분은 20% 남짓에 불과하다. 여유 있는 수치가 아니다. 호반은 18.46%다. 1.5%포인트 차이의 위태로운 균형이 싸움의 문을 열었다.

흥미로운 건, LS그룹까지 끼어있다는 점이다. 호반은 대한전선을 통해 LS와 소송전을 벌이다 LS 지주사 지분도 일부 매입했다. 그러자 한진과 LS는 즉각 사업 협력 MOU를 체결했다. 재계는 이 흐름을 '반(反)호반 연대'로 해석한다. 한진은 싸움을 예상하고 외곽 방어선을 구축 중이다.

이번에도 결국, 산업은행이다

모든 시선은 산업은행으로 향한다. 이 순간에도, 결정의 순간에도 '그 손'이 최종 카드를 쥐고 있어서다.

산업은행은 2020년, 한진칼에 8000억 원을 투입해 조 회장의 백기사로 등장했다. 아시아나 인수를 위한 구조조정 자금이란 명분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한진가 경영권을 방어한 핵심 세력이었다.

그때 체결한 투자계약엔 조 회장이 지분을 임의로 팔지 못하게 하고, 산업은행이 추천하는 이사에 찬성해야 하며, 나아가 조 회장 지분에 동반매각요청권까지 걸었다. 조 회장 입장에선 "사인한 순간, 내 뒤는 네가 맡아라" 식의 절대동맹이었다.

지금도 산업은행은 한진칼 지분을 한 주도 팔지 않았다. 보호예수 기간이 끝났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공식 입장도 같다. "통합 항공사 출범이 안 끝났다. 지금은 경영 안정을 봐야 한다." 이 말이 그대로면, 산업은행은 한진칼의 보호자이자, 호반의 벽이다.

다만 '지금은'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산업은행은 정해진 임무가 끝나면 지분을 정리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호반이 지분을 조금씩 쌓아가는 이유, '그날'이 오면 주도권을 쥐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조현아의 기억, 호반이 꺼낸 판

이 싸움이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다. 2019~2020년에 비슷한 구도를 본 적이 있어서다.

당시 조현아(개명 후 조승연)는 행동주의 펀드 KCGI와 반도건설과 손잡고 동생인 조 회장에 맞섰다. 지분을 모으고 연합하고, 정기 주총에서 표 대결까지 벌였다. 그러나 델타항공과 모친 이명희 고문이 조 회장 손을 들어주면서, 조현아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같은 해, 산업은행이 등장했다. 조 회장에게 실탄을 쥐어주고 제3자 배정 유상증자라는 칼을 휘두르며 조현아 연합의 힘을 꺾었다. 그렇게 한진가 분쟁은 산업은행의 개입과 함께 종결됐다.

KCGI가 떠난 자리에 호반이 앉았다. KCGI가 정리한 13.97% 지분을 2022년 호반건설이 고스란히 사들였다. 콜옵션 포함, 지분율은 17.43%까지 치솟았다. 과거 반(反)조원태 연합의 흔적을 그대로 물려받은 주체, 그게 지금의 호반이다.

차이점도 있다. 조현아는 '일가'였다. 감정의 색채가 짙었다. 호반은 아니다. 그들은 실리와 전략의 계산기를 두드리는 기업이다. 더 차가운 방식으로, 더 멀리 보는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조용한 전운, 시장의 반응

지금은 전쟁이 아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호반은 '우린 경영 참여 안 해요'라고 하지만, 지분을 더 모은다. 한진은 '우리 가족 결속은 굳건하다'고 말하지만, 외부 동맹까지 찾는다. 산업은행은 '지금은 지킨다'고 하지만, 언젠가 나간다.

시장은 이미 반응했다. 주가는 올랐고, 주총 시나리오가 도표 위에 놓였다. 소액주주들은 2020년처럼 "한 판 붙으면 우리도 좋다"는 기대를 품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지배구조란 권력의 문제다. 권력은 숫자로 움직인다.

호반은 숫자를 쌓고 있다. 한진은 숫자를 지키고 있다. 산업은행은, 마지막 숫자를 쥐고 있다. 이 숫자들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한진칼의 미래가 다시 그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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