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의 연봉이 던지는 질문, 보상과 리더십의 재구성
다시 재계의 숫자가 바꼈다. 오너의 '급여'는 사적인 연봉이 아니다. 억대 보수의 증감은 기업의 체질과 리더십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누군가는 위기 속 책임을 선택하며 보수를 반납하고 다른 이는 장기 인센티브라는 미래의 보상 체계로 새로운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그들의 '보수'는 시대의 질문에 답하고 기업과 리더의 가치관을 증명하는 사회적 문서에 가깝다. 직원과의 격차, 사회적 신뢰, 책임의 무게가 얽혀 있는 이 '순위표'는 대한민국 경제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다.
| 스마트에프엔 = 이장혁 기자 | 2025년 상반기 대한민국 재계의 풍경은 숫자 하나가 바뀜으로써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냈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이 163억 원을 기록하며 단숨에 연봉 1위에 오른 사실은 단순한 화제 이상의 파급력을 지닌다. 그의 보수에는 현금 급여와 단기 성과급도 포함돼 있지만, 절반 이상을 차지한 것이 바로 양도제한조건부주식(RSU)였다.

RSU는 기존 보수 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제도다. 연말 결산에서 나오는 단기 성과급과 현금 보너스가 보수의 핵심을 이뤘던 과거와 달리 RSU는 임원의 성과를 수년에 걸쳐 검증한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거나 부정행위가 드러나면 보수를 삭감하거나 회수할 수 있는 구조까지 포함한다. 보수가 '성과의 보상'에서 '책임의 증거'로 이동하는 과정인 셈이다.
19일 재계에 따르면 두산 사례는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준다. 과거 위기 상황에서 '구조조정 기업'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던 두산은 이제 '책임 경영'의 실험실로 변모했다. 박정원이 받은 163억 원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기업의 장기 전략을 시장과 사회 앞에 증명하겠다는 서약서와도 같다.
흐름은 다른 그룹에도 확산됐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계열사별 성과가 보수와 직접 연결되면서 124억 원을 수령했다. 한화솔루션의 에너지 사업,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방산 실적이 장기 인센티브로 반영된 결과였다. 그의 연봉은 한화가 선택한 '투자와 성장의 궤도'가 얼마만큼 시장에서 설득력을 얻었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장기 인센티브는 선택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가 됐다. 단기 실적에 급급한 경영자는 순위표에서 멀어지고 장기 전략을 제시하며 책임을 지려는 리더는 상위권에 오르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숫자 속에는 시간, 그리고 시간 속에는 책임이 새겨진다.
권력의 등락, 위기와 책임의 교차로
연봉 순위표는 권력 지도를 새로 그린다. 지도의 변화는 단순한 수치 변동이 아니라 각 그룹의 운명과 리더십의 스타일을 드러내기도 한다.

신동빈 롯데 회장은 99억 원을 받으며 3위에 올랐다. 주목할 부분은 '감소'다. 지난해 보다 19억 원이 줄었는데, 경영 성과의 부진 때문만은 아니다. 비상경영 체제 속에서 급여 반납과 상여 축소를 단행한 결과였다. 신동빈의 선택은 먼저 허리띠를 졸라매며 위기 극복 의지를 직원과 시장에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그 보수 감소는 손실이라기보다 책임을 시각화한 상징이었다. 뒤를 이어 항공·물류 실적 회복에 힘입어 보수가 상승한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92억 원을 받아 4위로 날았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또 다르다. 지난해 193억 원으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지만, 올해는 92억 원을 수령, 5위로 주저앉았다. 그 배경엔 장기 인센티브 집행 시차가 있었다. 2024년 집계된 보수는 사실상 3년치 성과가 한 번에 반영된 결과였다. 올해엔 그 효과가 사라지면서 금액이 줄었지만, CJ는 여전히 업계 최고 수준의 장기 인센티브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재현의 사례는 보수 총액의 '순간적 부풀림'이 아닌, '구조적 안정성'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10위권 안에는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했다. 박지원 두산에너빌리티 회장은 재무구조 개선 성과로 연봉이 51억 원으로 급등했다. LG 구광모와 SK 최태원 역시 각각 47억 원대의 보수를 기록하며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다. 현대차 정의선도 45억을 받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한 단기 이익보다 사업 포트폴리오 강화와 구조 재편, 디지털 전환을 통해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이 보수에 반영됐다는 점이다.

연봉의 증감은 그래서 단순한 돈의 흐름이 아니다. 위기의 순간 책임을 택한 리더, 장기 전략을 밀어붙이는 리더, 그리고 새로운 산업 지형을 개척하는 리더의 차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거울이다.
임금 격차와 신뢰, 거버넌스 시험대
오너의 억대 연봉은 언제나 논쟁거리다. 그들의 보수가 직원 평균의 15배에서 100배까지 벌어지는 현실은 사회적 지탄을 받기도 한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에 따르면 지난해 가장 큰 격차를 낸 곳은 CJ제일제당으로 나타났다. 손경식 CJ제일제당 회장이 82억 원을 받았던 시기 직원 평균 연봉은 7700만 원으로 106배나 차이가 났다.

격차는 단순한 불평등이 아니다. "그만큼 받을 자격이 있는가?"란 질문을 동반한다. 그 자격은 경영 성과만으로 답할 수 없다. 공정성, 투명성, 책임, 윤리적 정당성이 함께 검증돼야 한다.
최근 재계에서는 보상위원회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외부 전문가 검증을 받으며, 보상 구조를 상세히 공개하는 흐름이 확산되고 있다. 반기보고서에는 당해 목표치, 실제 성과, 삭감·회수 조항이 명확히 기록된다. 보수를 둘러싼 사회적 불신을 제도적 신뢰로 대체하려는 시도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무보수 경영'은 또 다른 해석을 불러온다. 그는 2017년 이후 보수를 받지 않으면서, '받지 않음' 자체를 리더십의 메시지로 삼았다. 보수의 크기보다 책임의 무게를 강조하는 방식이다. 받음과 받지 않음, 서로 다른 길이지만 '책임'이라는 기착지로 수렴한다.
대중의 시선은 더 날카로워질 것이다. 장기 인센티브의 확산이 단순한 제도적 트렌드를 넘어, 진짜로 사회적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직원과의 격차를 줄이지 못하는 한, 공정성과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리더들은 어떤 선택을 내릴까.
재계 리더의 연봉은 '순위표'가 아니다. 권력의 움직임, 리더십의 성격, 사회적 신뢰의 좌표를 한눈에 보여주는 지도와 같다. 숫자는 매년 변하고 순위는 끊임없이 뒤집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보수는 특권이 아니라 책임의 증거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