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반도체 수출 규제 면제 종료 예고
지정학적 통제에 흔들리는 한국 반도체

2022년, 미국이 중국을 향한 반도체 수출 규제를 전면화했을 때,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은 충격파에 휩싸였다. 그 와중에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예외였다. 중국에 생산거점을 둔 한국 기업이라는 이유로, 미국은 한 발 물러나 '제한적 면제'를 부여했다. 기술의 흐름을 막되, 동맹의 산업 기반까지 무너뜨릴 순 없다는 일종의 '타협'이었다.

그 타협은 오래가지 않았다. 20일(현지시간)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 담당 차관인 제프리 케슬러는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해 대만 TSMC 같은 글로벌 주요 반도체 기업에 수출 통제 면제를 종료할 계획을 공식적으로 통보했다고 월스트리스저널이 보도했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건설 중인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사진=삼성전자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건설 중인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사진=삼성전자

중국 내 한국 반도체 기업은 미국산 장비를 들여오기 위해 미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구조로 바뀔 가능성이 커졌다. 이 허가는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국가의 전략적 판단이 개입되는 '정치적 승인권'에 가깝다. 미국은 기술 공급망의 통제권을 현실화하고 있다.

생산 차질 정도가 아니다. 단기적 위기를 넘어 중장기 전략에 깊은 균열을 만들 수 있다. 삼성전자 시안 공장은 낸드(NAND) 생산량의 약 40%를 담당하고 있으며, SK하이닉스 우시 공장은 글로벌 D램 공급의 주력 생산기지다. 이들 공장들이 즉시 멈추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 장비가 정기적으로 투입되지 못하면 기술 전환 주기가 끊기고 이는 곧 제품 경쟁력의 정체와 시장 점유율 하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기술이 아닌, 타이밍이 무기화되는 시장

한 글로벌 반도체 투자 전문가는 "장비 반입 허가 여부보다 기술 사이클의 지연 자체가 더 큰 문제"며 "AI와 고성능 컴퓨팅 수요가 급등하고 있는 지금, 몇 개월의 업그레이드 지연은 수년 치 점유율 손실로 직결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HBM, EUV 등 고부가 메모리 시장은 이미 기술 주도권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 흐름에서 한 박자만 늦어도 시장에서 도태되는 것은 자명하다.

SK하이닉스 우시 공장 /사진=SK하이닉스
SK하이닉스 우시 공장 /사진=SK하이닉스

전략적 선택지가 많지 않다. 철수는 위험하고, 잔류는 불확실하다. 중국시장은 여전히 글로벌 최대 수요처지만 자국 반도체 생태계를 키우려는 중국의 전략은 갈수록 공격적으로 변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발을 뺀다면, 그 빈틈은 중국 업체들이 메울 것이다. 한 국내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철수의 대가는 되돌릴 수 없는 시장 상실"이라며 "장기적으로 더 위협적인 것은 물러서는 것보다 전략이 없는 것이다"고 경고했다.

해법은 있을까. 한국과 미국 내 생산능력 확대, 장비 공급망의 다변화, 기술 로드맵 재조정 등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확정적이지 않고 미국의 눈치만 보는 상황이 이어질 수 있다.

삼성전자 시안 공장 /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 시안 공장 /사진=삼성전자

기술 패권 경쟁, 자본시장 리스크로

미국은 자국 기술이 중국 반도체 산업에 흘러들어가는 경로를 원천 차단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동맹인 한국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이번 메시지의 핵심이다.

과거엔 기술의 중심이 민간이었지만, 지금은 기술이 국가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 기술보다 더 예측 불가능한 것이 정치 리스크인 셈이다. 제품 스펙보다도 공급망의 지리적인 분산, 기업이 속한 진영이 어디인가가 글로벌 시장에서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 등이 지난 3월 28일(현지시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 면담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 등이 지난 3월 28일(현지시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 면담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하나의 질문이 주어졌다. "당신들의 통제권은 어디에 있는가?"

공장은 중국에 있지만, 장비는 미국의 손에 있다. 기술은 자사에 있지만, 사용 권한은 타국의 허가에 달렸다. 모순된 구조를 해소하지 않는 한, 반도체 산업의 '초격차'는 언제든 정치판에서 흔들릴 수 있다.

미국의 수출 통제 면제 조치가 끝나게 된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가장 조용하고도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그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진정 손에 쥐어야 할 것은 '기술'이 아니라 '주도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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