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독' 징후, 단기 유동성으론 재무 체질 회복 불가
정부 가이드라인 부재, 구조조정 시기 놓치면 위기 확산
| 스마트에프엔 = 김동하 기자 | 전남 여수의 에틸렌 생산업체 여천NCC가 대주주 간 갈등과 누적된 재무 악화 속에 3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자금난을 겪고있다. 공동주주인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의 긴급 지원으로 당장의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은 낮아졌지만, 전문가들은 단순한 시간벌기에 불과하다고 경고한다.
이번 사태는 중국·중동발 공급 과잉과 글로벌 수요 둔화라는 구조적 악재 앞에서 국내 석유화학 산업 전체가 재편을 피하기 어렵다는 경고로 해석된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여천NCC는 3공장 임시 가동 중단과 수천억원대의 단기 자금 부족 현실이 맞물리며 '디폴트 직전'이라는 위기 국면에 놓였다.
올해 상반기 여천NCC는 업황 악화로 경영압박이 심화되자 공동주주에 약 3000억원의 추가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한화는 이사회에서 1500억원 지원을 결의했으나, DL은 초기에 신중론을 견지했다.

8월 초 악화된 실적과 유동성 부담으로 3공장 가동을 중단했고, 회사는 8월 21일까지 약 3100억원의 운영자금을 확보하지 못하면 디폴트 가능성이 있다는 내부 보고를 외부에 알렸다.
DL 그룹(및 DL케미칼)은 긴급 이사회를 열어 여천NCC 지원 방안을 확정, DL케미칼의 유상증자·모회사 참여 등으로 약 2000억원의 추가 자금을 투입하는 안을 통과시켜 단기 위기를 모면했다.
'밑 빠진 독'의 징후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여천NCC는 최근 수년간 영업 적자가 누적되며 재무건전성이 급속히 악화됐다. 2022년 이후 누적 당기순손실 규모가 수천억원에 달하고(연도별 대규모 손실), 200%대의 부채비율에 더해 순차입금은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신용평가 보고서는 2025년 1분기까지의 누적 손실과 차입 부담, 연간 수백억 원대의 이자비용 등을 근거로 ‘재무 완충력 약화’를 지적하고 있다. 여천NCC의 구조적 취약성은 단기 유동성 공급만으로 해소되기 어렵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업계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핵심 원인은 외부의 구조적 충격이다.
2020년대 들어 중국 및 중동 지역에서 대규모 신규 설비(에틸렌·프로필렌 등 기본 석유화학 설비)가 가동되면서 글로벌 공급과잉이 심화됐고, 이에 따른 가격 하락과 수익성 악화가 장기화됐다.
국내 기업들은 원가·규모 경쟁에서 불리한 조건에 놓였고, 여천NCC의 실적 부진은 이러한 국제적·구조적 요인의 영향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자구책은 있었지만 한계 분명
국내 석유화학사들은 지난 수년간 자산 매각, 설비 가동 효율화, 비핵심 사업 정리 등 다양한 자구책을 실행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기업 내부의 비용 구조 조정’에 불과하며, 과잉공급으로 인한 마진 축소와 같은 외생적 충격을 상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특히 합작사 형태로 운영되는 여천NCC처럼 주주 간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구조에서는 긴급 의사결정과 자금 투입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
단순히 '한 회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천NCC가 생산하는 에틸렌은 플라스틱·섬유·포장재 등 광범위한 제조업의 기초 원료다.
따라서 여천NCC의 설비 축소·가동 중단은 공급망(원료-중간재-완제품)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지역 경제(여수국가산업단지)와 연관 기업들의 원가·수급 전략에도 파장을 낳는다.
이번 사태로 다른 석유화학 기업들도 설비 감축이나 가동 중단을 검토하는 등 '셧다운 도미노'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

"긴급 수혈만으로는 한계"…산업 구조개편 시급
전문가들은 이번 여천NCC 사태를 두고 "단기 유동성 지원만으로는 위기를 막을 수 없다"며 구조적 대응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신용평가 등 신용평가사들은 "과잉설비와 글로벌 공급과잉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단기 자금 수혈은 단순한 ‘시간 벌기’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중국과 중동의 대규모 신규 생산설비 가동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이 원가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비슷한 위기가 반복될 것이라는 경고다.
이에 따라 업계와 학계에서는 ▲업계 차원의 공급 조정 및 감산 ▲경쟁력 약한 설비의 매각·통폐합 ▲비시장적 저가 공세에 대응하는 무역·관세 정책 ▲구조개선 조건부 금융·재정 지원 등을 정책 과제로 제시한다. 한 석유화학 관계자는 "생산능력을 유지하면서 가격 경쟁력을 잃은 상태로는 장기 생존이 불가능하다"며 "정부가 나서 업계가 스스로 구조를 재편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현재의 석유화학 위기는 개별 기업의 경영 실패라기보다 산업 구조 전체의 취약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정부와 업계가 공급과잉 완화, 에너지 효율 개선, 고부가 제품 전환 같은 중장기 전략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단기적으로는 한화·DL의 자금 투입으로 당장의 디폴트 위기는 피했지만, 중장기적 회복은 업황 개선(글로벌 수급 균형 회복)과 국내 업계의 구조조정 속도에 달려 있다.
만약 공급 과잉과 가격 압박이 계속된다면 추가적인 구조조정(감원·설비 매각·M&A)이 불가피하며, 이 과정에서 지역 경제와 고용 충격이 뒤따를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업계가 의미 있는 공급조정과 원가 경쟁력 향상에 성공하면, 여천NCC 사태는 ‘통과의례’로 끝날 수도 있다.
경고음에서 전환점으로
여천NCC의 위기는 ‘개별 기업의 위기’라는 범주를 넘어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체질적 취약성을 드러냈다.
당장의 유동성 수혈로 불은 꺼질 수 있어도, 같은 조건의 외부 충격이 반복되면 또 다른 기업이 ‘다음’이 될 수 있다. 정부와 업계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단기 대책과 함께 중장기적 구조 재편 로드맵을 신속히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권남훈 산업연구원장은 "정부 차원에서 구조조정 방향에 대해서 명확하게 가이드라인을 줘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불확실성이 커져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