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경산업 품고 '제2의 도약' 시동

| 스마트에프엔 = 이장혁 기자 | 정적이 길었다. 17년 동안 태광그룹은 M&A 무대에서 보이지 않았다. 화학·섬유의 구시대 성장 축을 붙들고 버텼지만, 시장의 파고는 매서웠다.
2025년. 정적이 깨졌다. 태광그룹이 애경산업 우선인수협상자가 되며 'K-뷰티'란 새 무대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단순한 인수합병이 아니다. 재계 30위권까지 올랐던 태광이 '잃어버린 10년'을 끝내고 부활을 선언하는 상징과 같았다.

애경산업 Why?···위기 업황과 넘치는 현금의 교차점
태광이 화장품시장에 진입한 이유는 명확하다. 심각한 수익성 악화. 태광산업 본업인 석유화학과 섬유는 중국발 공급 과잉, 글로벌 경기 둔화, ESG 압력까지 겹치며 불황에 빠졌다. 2022년부터 3년 연속 영업적자를 기록한 현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신호였다.
실적이 이런데도 태광은 '현금부자'다. 2조 7000억원에 달하는 현금성 자산을 쥐고 있다. SK브로드밴드 지분 매각으로 확보한 거대 자금은 '현금방석'이 아니라, 써야 할 '투자탄약고'였다. '실탄'을 어디에 쏘느냐가 그룹의 생존을 가를 문제였고 타깃은 '고부가가치 소비재'였다. 애경산업 인수는 그렇게 준비된 승부수였다.
애경산업은 1954년 애경유지공업으로 출발한 애경그룹의 모태다. 샴푸, 세제, 화장품 같은 생활 속 깊이 스며든 브랜드를 일궈냈지만, 애경그룹은 주력 사업을 항공과 화학으로 재편하려 창업의 근간을 과감히 내려놨다.
핵심 사업조차 매각되는 현실은, 재계의 판단이 '오너중심'에서 '시장효율'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태광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애경산업이 가진 강력한 소비재 브랜드, 특히 해외 매출 비중이 70%에 달하는 화장품 포트폴리오는 태광이 그간 손댈 수 없던 영역이었다.
은둔의 경영자 이호진의 귀환? 상징을 넘어 압박으로
애경산업 인수 배경에는 무엇보다 이호진 전 회장의 복귀가 겹쳐 있다. 횡령·배임으로 10년 넘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던 그는 2023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복권됐다. 지금은 비상근 고문에 불과하지만 그룹 내 주요 의사결정엔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게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태광 2대주주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이호진에게 사실상 경영 전면 복귀를 요구했다. 태광산업의 저평가가 극심하다며 오너가 책임지고 기업 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압박에 나섰다. 경영 복귀는 이호진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외부 주주의 요구이자 기업 생존 과제가 되버린 것이다.
태광 측은 "이 전 회장이 복권 이후 복귀를 준비하긴 했지만 건강상 이유로 경영은 무리가 있다는 의료진 권고가 있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도 이호진이 경영 일선에 복귀한다면, 그룹의 행보는 더 공격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 애경산업 인수는 단지 시작일 뿐, 향후 10년간 12조원의 투자 계획이 기다리고 있다. '현금부자'에서 'K뷰티 거인'으로의 변신은 이호진 체제의 첫 번째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B2B에서 B2C로, 체질 바꾸는 담대한 항해
이번 인수는 태광이 '기업 간 거래(B2B)' 중심에서 '소비재(B2C)' 그룹으로 체질을 바꾸겠다는 선언이다. 과거의 태광이 원재료를 만들어 기업에 납품했다면, 미래의 태광은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브랜드 기업으로 거듭나려 한다. 단순히 포트폴리오 확장이 아니라, 그룹 정체성을 뒤흔드는 대전환이다.

애경산업 화장품 브랜드는 글로벌 잠재력이 크다. 수출 80%가 중국에 집중되고 있지만 태광은 기회로 해석했다. 금융 계열사(흥국생명·흥국화재), 미디어·홈쇼핑 채널(티캐스트·쇼핑엔티)을 활용해 유통-콘텐츠-뷰티를 잇는 시너지를 설계할 수 있어서다. 이호진의 리더십이 더해진다면, 시너지는 더 강력해질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태광그룹이 10년 넘게 정체됐던 투자 시계를 다시 가동하며 사업 확장에 절박함을 보이고 있다. 이호진 전 회장의 복귀 여부와 관계없이 그룹의 변화 모멘텀은 시작됐다"며 "애경산업 인수는 태광그룹이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경영 정상화에 힘을 싣는 변곡점이 될 것이다"고 밝혔다.
태광의 애경산업 인수는 재계의 구조조정, 오너리스크 논쟁, 포트폴리오 전환이라는 세 가지 흐름이 교차하는 사건이다. 17년간 멈췄던 시계를 다시 움직인 태광이 애경을 품고 'K뷰티 거인'으로 우뚝 설 수 있을지, 또 다른 불확실성에 갇힐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새로운 항로를 설정한 태광의 항해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