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발 변수 아닌 예견된 참사
빠른 길보다 정직한 길 찾아야

이장혁 산업팀장(부장)
이장혁 산업팀장(부장)

9월 4일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공장에서 발생한 한국인 300여 명 대규모 구금 사태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군사작전처럼 투입된 500여명의 단속 인력, 이어진 구금과 강제 출국 압박은 한국 기업과 정부에게 보낸 '경고장'이었다.

예견된 참사였다.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은 상반기부터 비자 발급 문제의 심각성을 정부에 여러 차례 알렸다. 돌아온 답은 '유의사항 안내'라는 대응뿐이었다. 현장의 절박함과 정부의 안일한 태도 사이의 온도차가 대규모 구금사태로 귀결된 것이다.

사건의 핵심은 명확하다. 기업들이 전자여행허가(ESTA)와 단기 상용비자(B1)를 장기 취업비자처럼 사용해왔다는 점이다. 90일 체류 제한이 있는 ESTA로 85일간 생산 현장에서 근무하거나, 회의와 계약 업무에 한정된 B1 비자로 공장 건설과 설비 운영을 맡기는 것은 명백한 규정 위반이었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업계 전반의 관행이었다는 사실이다. 현지에서 숙련 인력을 구하기 어렵다고는 하지만 불법이 현실의 어려움을 덮어줄 순 없다.

관행은 왜 계속됐을까. 미국의 비자 제도는 까다롭다. 전문직 취업비자(H-1B)는 연간 쿼터가 한정돼 있고 주재원 비자(L1·E2)는 승인까지 수개월 이상 걸린다. 당장 설비를 세팅하고 공정을 점검해야 하는 제조업 입장에서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미국은 법치주의 국가다. 경제 논리와 필요성이 아무리 절박해도 법을 어기면 처벌이 따른다. 이번 단속에선 적법한 주재원 비자를 가진 직원들까지 구금됐다. 불법 인력 적발을 넘어, 한국 기업 전체를 향한 강력한 경고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파는 즉각 나타났다. 현대차는 "공장 건설이 최소 2~3개월 지연된다"고 인정했고 LG엔솔 역시 합작 공장 건설을 중단했다. 예정된 내년 가동 시점도 언제가 될지 모른다. 삼성전자는 'ESTA 출장 시 2주 내 복귀' 지침을 내렸고 현대차는 미국 출장을 모두 취소했다. 사실상 주요 기업들의 미국 현장이 멈춰 선 셈이다.

뒤늦게 정부는 한국인 전용 취업비자(E-4) 쿼터 확대를 추진하겠다 했지만 이미 10여 년 전부터 제기되어온 숙제였다. 비자 문제를 기업의 '편법'이나 '개별 리스크' 정도로 치부하며 뒷전에 둔 결과가 지금의 사태다. 신뢰가 흔들린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은 더 엄격한 감시와 규제를 감내해야 할 것이다.

사건이 남긴 교훈은 분명하다. 해외 사업에서 '빠르고 편리한 길'을 찾는 한국식 관행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글로벌 무대에서는 합법성과 성실성이 절대 원칙이다. 단기적으로는 비자 발급 체계를 정비해 합법적 파견 구조를 만들고 장기적으로는 현지 인력 양성과 기술 이전을 통해 사업 자립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정부 역시 기업들의 경고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위기 이후 땜질식 대응이 아니라, 예견된 문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외교력이 필요하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편법을 청산하지 않는다면, 같은 문제가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현대차·LG엔솔 사태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냈다. 법과 원칙을 기초로 한 근본적 체질 개선 없이는, 한국 기업들의 세계 무대는 늘 불안한 모래 위의 성일 뿐이다.

저작권자 © 스마트에프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