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사 자금난 조기 지급으론 근본 해결 어려워
단발성 비용이 아니라 장기 투자로 인식해야

이장혁 산업팀장(부장)
이장혁 산업팀장(부장)

추석을 앞둔 재계가 이례적으로 발 빠르게 움직였다. 삼성, 현대차, LG, 롯데, CJ, 한화에 더해 신세계와 현대백화점까지 가세하며 협력사 납품대금을 앞당겨 풀었다. 총액은 6조4703억원. 취약계층 지원, 전통시장 활성화, 기부와 봉사까지 더해 '상생경영'이 더는 구호가 아닌 행동이 됐다.

숫자는 묵직하다. 삼성 1조1900억원, 현대차 2조228억원, LG 9800억원, 롯데 8957억원, CJ 3000억원, 한화 3035억원. 여기에 신세계 2000억원, 현대백화점 2107억원이 합류했다. 자금난에 허덕이던 협력사에는 생존 자금이고 내수 경기에는 숨통이다. 현대차가 3차 협력사까지 조기 지급을 유도한 조치는 단순 지원을 넘어 '상생의 선순환'을 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하지만 이 거대한 돈의 흐름을 '명절이벤트'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협력사와 지역경제는 여전히 불안하다. 자금줄이 막히면 가장 먼저 흔들리는 것은 납품업체와 소상공인이다. 조기 지급은 한국 경제 구조의 민낯을 드러내는 동시에, 동반성장 없이는 대기업 스스로도 장기적 경쟁력을 잃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켰다.

상생의 방식은 분명 달라지고 있다. 삼성은 스마트공장과 연계한 온라인 장터를 열었고 LG는 150억원 온누리상품권을 매입해 전통시장을 살렸다. CJ는 인디 브랜드의 글로벌 진출을 돕고 롯데는 1조원 동반성장펀드로 파트너사에 숨통을 틔웠다. SK하이닉스는 23억원을 기부하고 헌혈 캠페인을 이어갔고 포스코는 77억원어치 지역상품권과 선결제를 통해 취약계층과 지역 상권을 동시에 살렸다. 모두 CSR을 넘어 기업 전략의 일부로 자리 잡은 사례다.

그런데도 한계는 뚜렸하다. 매 명절 반복되는 조기 지급은 근본 처방이 될 수 없다. 협력사의 만성적 자금난은 금융 접근성 부족, 납품단가 후려치기, 불공정 거래라는 오래된 고질병에서 비롯된다. 제도적 개선 없이 자금을 앞당겨 주는 것만으론 상생경영이 보여주기식 이벤트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6조4703억원은 분명 의미 있는 신호탄이지만 진짜 시험대는 앞으로다. 상생이 단발성 비용이 아니라 장기적 투자로 굳어질 때, 한국 기업은 글로벌 무대에서 '지속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경쟁력을 얻는다. 재계의 선택지는 명확하다. 또 한 번의 이벤트로 끝낼 것인가, 협력사와 경쟁력을 쌓아갈 것인가. 6조원이 어떤 역사로 남을지는, 기업 스스로의 실천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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