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어는 단순한 고무제품이 아니다. 고분자화학과 구조역학이 집약된 기술의 결정체다. 미국 굿이어(Goodyear) 타이어는 1907년 포드 모델T에 장착된 이래 달 표면에 바퀴자국(track)을 남긴 아폴로14호의 XLT타이어, 기후 변화를 극복한 사계절용 타이어와 펑크 난 상태에서도 오랫동안 달릴 수 있는 런플랫타이어 개발까지 타이어기술의 역사를 주도해 왔다.
1931년 일본의 청년사업가 이시바시 쇼지로(石橋 正二郎, 1889-1976)는 자신의 이름 '석교(돌다리)'에서 착안한 '브리지스톤(Bridgestone)'이란 이름의 타이어회사를 설립했다. 태평양전쟁 중 일본군이 점령한 인도네시아 자바 내 굿이어 타이어공장을 위탁 운영하던 쇼지로는 일본의 패전를 예감하고 군부가 퇴각하며 "공장 소각"을 명할 것에 대비해 직원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공장을 온전하게 굿이어에 돌려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공장을 되찾은 굿이어는 브리지스톤에 전폭적으로 기술을 전수했다. 굿이어의 기술을 전수받은 브리지스톤은 오늘날 세계 1위로 우뚝 섰다. 전선도 뛰어넘은, '돌다리'처럼 탄탄한 기업가정신이 만들어낸 결과다.
불모지에서 출발한 우리 타이어산업은 그런 기회조차 없었다. 한국타이어의 요람은 고무 냄새가 진동하는 작은 공장이었다. 1941년 설립된 '조선다이야(타이어)공업'은 해방 후 정부에 귀속돼 '한국다이야'로 이름을 바꾼 후 경영난에 봉착했다. 1967년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가 인수하면서 전기를 맞았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수요가 폭발했고 조 회장은 직접 고무를 자르고 밤새 분석하며 기술 독립에 매달렸다.
"우리 손으로 못 만들면 이건 영원히 외국 것일 뿐이다."
집념은 1974년 승용차용 래디얼타이어 개발로 결실을 맺었다.
아들 조양래 회장은 이 기술을 세계로 가져갔다. 아시아를 넘어 미국, 유럽에 생산기지를 구축하며 글로벌 확장을 시작했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에도 "어려울수록 기술을 포기하지 말자"며 연구개발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타이어광'답게 3만 원짜리 농경용부터 300만 원에 달하는 고급 타이어까지 종류와 가격을 모두 꿰고 있었다.
'자동차의 신발' 국산화를 넘어 세계 최고의 기술을 확보하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을까. 정작 자신의 구두는 바꿀 줄 몰랐다. 한 켤레를 5년 넘게 신고 다녔는데 식당에서 벗어 놓은 낡은 구두를 직원들조차 회장님 것인 줄 몰랐다고 한다. 근검절약하는 성품만큼 기업가정신도 투철했다. "매출이 2,000억 원을 넘으면 소유와 경영은 분리돼야 한다"며 일찍이 전문경영인체제를 도입했다.
오늘날 한국타이어는 포르쉐, BMW, 아우디 같은 글로벌 프리미엄 브랜드에 제품을 공급하며 180여 국에 수출되는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모든 성과가 우리 기술로 이루어졌다. 굴러가는 '고무 원' 안에는 한 세대의 집념과 다음 세대의 결단, 그리고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지금 세대의 자신감이 응축돼 있다.
쌍벽을 이루던 금호타이어가 그룹 해체와 외국계 자본 유입으로 정통성을 잃어가게 되면서 한국타이어의 가치와 상징성은 더욱 커졌다. 국가산업 자립의 상징이며 국호를 걸고 세계를 달리는 바퀴가 됐다.
그러나 쌩쌩 달려야 할 바퀴에 제동이 걸릴지도 모른다. 한국타이어 3세 조현범 한국앤컴퍼니그룹 회장의 1심 선고가 29일로 다가온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