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에서 만난 재계 총수들
한미 빅딜 후 펼쳐지는 '첨단산업 리셋'의 서막

이재명 대통령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이재명 대통령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 스마트에프엔 = 이장혁 기자 | 11월 1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유례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이재명 대통령과 국내 대기업 총수들이 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일련의 간담회가 아니었다. 한미 관세협상이라는 거대한 변곡점 뒤에, 대한민국 첨단산업의 미래를 다시 짜는 '정책·기업 공동 설계도'가 놓여 있었다.

이 자리에서 재계가 던진 답은 파격이었다. 향후 5년간 1300조원(SK 600조 적용 시) 국내 투자. 한 국가의 예산에 버금가는 규모가 민간의 입에서 나왔다. 이 숫자는 한국 첨단산업의 향후 10년, 아니 수십년을 규정하는 새 기준이 됐다.

이재명 대통령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이재명 대통령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시작은 한미 관세·안보 협상 타결이었다. 양국은 '조인트 팩트시트'를 확정했고 한국은 3500억달러 규모의 전략적 투자를 약속했다. 자동차 관세는 25%에서 15%로 낮아지고 조선·반도체·의약품 등의 232조 관세도 재조정됐다.

대가도 있었다. 한국은 2000억달러 현금 투자, 1500억달러 규모 조선 협력에 서명했다. 협상이 공개되자 국내에는 우려가 번졌다.

"대미 투자에 밀려 국내 투자는 멈추는 것 아니냐."

그 우려를 재계는 단번에 뒤집었다. 대미 투자와 국내 초대형 투자. 즉, 양쪽 모두 확장하는 이중 전략을 내놓은 것이다.

삼성 450조···반도체도, 지역도 다시 그리다

이재용 회장은 가장 먼저 '빅 넘버'를 꺼냈다. 450조원. 핵심은 평택 P5 라인이다. 단일 팹 프로젝트로 60조원 이상이 투입되는 규모, 그리고 글로벌 AI 붐으로 폭발하는 메모리 수요를 겨냥한 초정밀 계산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삼성의 투자 계획은 한 곳이 아니었다. 전국을 첨단 산업 벨트로 묶는 작업이 병행됐다. 전남은 국가 AI 컴퓨팅센터(SDS), 구미는 AI 데이터센터, 광주는 공조·냉동 신생산라인, 울산은 전고체 배터리 생산기지(SDI), 아산은 8.6세대 OLED 양산, 부산은 서버용 패키지기판 생산 확대의 거점이 된다.

이재용이 꺼낸 그림엔 반도체만 있지 않았다. AI-배터리-디스플레이-데이터 인프라를 하나의 산업권으로 묶는, 삼성판 초광역 경제 지도다. 이재용은 국내 6만명 고용도 다시 한번 못 박았다. 국가기간산업 정책에 가까운 약속이었다.

현대차 125조···'미래 모빌리티 종합 플랫폼'으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가장 명확한 비전을 내놨다. 숫자보다 방향이 더 강렬했다.

5년간 125조2000억원. 직전 5년보다 40% 이상 늘어난 역대 최고 규모다. 투자 비중은 현대차의 전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미래신사업(AI·SW 중심 차량, 전동화, 로보틱스, 수소)에 50조5000억, R&D에 38조5000억, 경상투자에 36조2000억원을 쏟아붙는다. 

정의선 현대자동차 그룹 회장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정의선 현대자동차 그룹 회장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국내 공장의 완성차 수출을 확대하고 국내 전기차 전용 공장 신설을 통해서 자동차 차량 수출을 2030년까지 현재 대비해서 2배 이상 확대할 계획이다."

현대차는 제조업 넘어 플랫폼 기업 전환을 이미 시작했다. AI센터-로봇파운드리-그린수소 생태계-EV공장까지. 울산의 EV 전용 공장은 내년에 완공된다. 서남해안에 들어서는 1GW 규모 PEM 수전해 플랜트는 한국의 그린수소 시대를 여는 상징이 될 것이다.

채용도 공격적이다. 7200명부터 1만명까지. 정의선은 모빌리티 플랫폼 전환을 '고용 드라이브'로 연결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SK···128조보다 더 커진 그림, 용인 600조 클러스터

최태원 회장은 계획했던 128조원보다 훨씬 더 큰 그림을 공개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다. 

"정확한 계산은 불가능하나 용인 클러스터만 600조원 규모로 커질 수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초대형 팹 4기가 용인에 새로 들어서면 AI 메모리 중심 거점이 될 것이다. 최태원의 목표는 명확하다. HBM 폭증에 맞춰 AI 메모리 세계 표준을 SK가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그리고 이 사업은 단일 기업이 아니라 국가 산업 생태계에 걸친 프로젝트가 될 전망이다. 매년 1만4000~2만명 규모의 고용효과, 반도체 인프라·소부장·지역경제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초대형 파급력이 예상된다.

LG 100조···소재·부품·장비 중심의 수직 강화

구광모 회장은 5년간 100조 투자 계획을 공개했다. 그중 60조가 소재·부품·장비(소부장)에 투입된다. 배터리·센서·디스플레이 등 LG가 세계적 경쟁력을 갖고 있는 분야에서 핵심 공급망을 국내에 굳건히 세우겠다는 전략이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구광모의 계획은 조용하지만 단단했다. 화려한 숫자보다는 구조적 기반을 강화해 한국 제조업의 품질과 신뢰성을 키우는 방식이다.

"국내 생태계 경쟁력을 높여 수출과 성장을 이끌겠다."

가전명가 LG가 제조기업 넘어 소재기술 기업으로 정체성을 강화하겠다는 비전을 담아냈다.

HD현대·한화·셀트리온···전 계열의 '첨단화 선언'

정기선 HD현대 회장은 조선·해양에 7조원, AI 기반 기계·로봇에 8조를 투자, 총 15조의 투자계획을 밝혔다.

정기선은 "마스가(MASGA)를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 미국 조선업 재건 사업을 저희가 새로운 사업 기회를 포착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한화는 방산과 우주, 그리고 에너지사업에 11조를 쏟아붓는다. 셀트리온도 생산라인을 확대하고 스타트업 펀드 운용을 두 배 늘려 1조원까지 확대한다.

여승주 한화 부회장은 "필리조선소에 7조원 이상을 투자할 계획이다. 미국 조선시장 투자는 국내 조선산업과 기자재 산업의 새로운 시장이 될 것"이라며 "국내 조선·방산 분야에만 향후 5년간 11조원을 투자할 것"이라고 했다.

 여승주 한화그룹 부회장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여승주 한화그룹 부회장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

서정진 회장은 "글로벌 톱 제약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고 선언했다. 한국 바이오산업이 대량 생산·파이프라인 확장·글로벌 임상 세 가지에서 동시에 속도를 내겠다는 의미다. 이어 "스타트업들과 운용 중인 5000억원 규모의 펀드를 1조원 키우겠다"고 말했다.

전례 없던 한미 동시 투자···대한민국 '50년 청사진' 그린다

한미 관세협상 과정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은 '공동화'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우려를 직접 꺼냈다.

"국내 투자가 줄어들지 않도록 힘써달라."

이번 발표로 대한민국의 전략은 분명해졌다. 대미 투자로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거점을 확보하고 국내 투자로 생산·R&D·AI·배터리·수소·로봇 산업의 초대형 생태계를 구축한다는 것.

전례가 없는 전략이다. 한국 기업이 미국·한국 두 국가에서 동시에 산업 구도를 짓는다는 의미여서다.

AI·반도체·배터리·수소·로봇·조선. 산업의 전 영역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국 도시가 산업별로 새로운 역할을 맡는 '국토 산업 재배치'가 시작되는 셈이다.

이재용은 말했다. "국내 투자 축소는 없다. 청년 일자리와 중소기업 상생까지 모두 챙기겠다." 정의선은 덧붙였다. "역대 최대 규모의 투자와 혁신으로 대한민국 경제 활력을 되살리겠다."

대통령실에서 발표된 1300조원 투자 계획은 대미 공략으로 외부 시장을 열고 국내 초대형 투자로 산업 생태계를 재편하는 대한민국 산업전략의 대전환이 본격화됐다는 신호다. 정부와 기업이 함께 그린 한국 경제의 50년 청사진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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