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리스크 털고 제2도약 시동
반도체 위기와 '뉴 삼성' 과제 풀어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서울고법에서 열린 그룹 경영권 승계 관련 부당합병·회계부정 의혹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서울고법에서 열린 그룹 경영권 승계 관련 부당합병·회계부정 의혹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스마트에프엔 = 이장혁 기자 | 한 시대를 관통한 법정 드라마가 막을 내렸다. 2015년부터 장장 10년에 걸쳐 이어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17일 대법원의 무죄 확정 판결로 역사적 마침표를 찍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최순실 게이트' 연루부터 시작된 그의 재판은 이후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부당합병·회계 부정 혐의로 이어지며, 한국 재계의 민낯과 권력 관계를 드러낸 상징적 사건으로 남았다. 이 재판의 긴 여정은 한 재벌 총수 개인의 운명을 넘어 기업과 정치의 관계, 법 앞의 경영권 승계 문제 등 기업과 사회의 고민을 응축해 왔다.

이 회장은 10년간 굴레처럼 따라다닌 사법 리스크로 경영 활동에 큰 족쇄가 채워졌다. 글로벌 경제가 숨 가쁘게 변화하는 동안, 삼성은 총수의 부재와 잇단 재판으로 주요 의사결정이 지연되거나 보류되었고 위기 대응이 둔화됐다. 그 사이 대규모 투자와 신사업 진출 등에서 과감한 승부수를 두지 못하며 성장 정체와 내부 위기감이 커져갔다.

사법 리스크 종식과 삼성의 전환점

무죄 확정으로 족쇄가 풀린 지금, 재계 안팎의 시선은 이 회장이 이끄는 '뉴 삼성' 시대에 쏠려 있다. 10년의 시련을 딛고 새로운 삼성은 어떤 길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긴 법정 싸움이 끝나게 되면서 삼성의 경영 의사결정 환경 개선이 기대된다. 그동안 "총수의 사법 리스크로 과감한 투자 결정이 제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던 삼성은, 묵혀둔 과제들을 속도감 있게 추진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올해 들어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 활발한 M&A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심 무죄 선고 이후 미국 오디오 기업 마시모 사업부를 약 5000억 원에 인수하고, 독일의 공조 업체 플렉트를 2조4000억 원에 인수하는 등 굵직한 빅딜에 시동을 걸었다. 최근엔 미국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 젤스 인수 계약을 체결하며 한동안 멈춰 있던 글로벌 M&A 시계를 다시 돌려놓았다. 연이은 인수 행보는 사법 리스크 해소에 따른 삼성의 변화 가능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회장의 행보도 빨라졌다.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과 면담하고 곧바로 일본을 찾아 현지 사업 파트너들을 만나는 등 광폭 행보를 이어갔다. 특히 미국 아이디어호에서 열린 글로벌 CEO 네트워크 행사 '선밸리 콘퍼런스'에 참석해 국제 무대에 복귀신호를 알렸다. 선밸리 콘퍼런스는 전 세계 유력 기업인들이 모이는 비공개 교류의 장으로, 기업 간 파트너십 논의와 M&A '막후 협상'이 이루어지는 자리로 유명하다.

이 회장이 선밸리에 나타나자, 국내외 언론은 이를 경영 보폭 확대의 신호로 해석했다. 실제로 그는 이 자리에서 빌 게이츠, 팀 쿡, 순다르 피차이, 샘 올트먼 등 글로벌 기술 거물들과 교류하며 AI 분야 협력 및 신성장 사업 기회를 모색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영 일선에 복귀한 총수는 그간 억눌렸던 글로벌 네트워크를 다시 가동하며 삼성을 둘러싼 대외 환경을 유리하게 재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삼성 내부에서는 "이제야 총수가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앞으로는 미뤄졌던 혁신 계획들이 탄력 받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번지고 있다.

재계 역시 "사법 리스크 해소로 이 회장이 그간 미뤘던 굵직한 결정을 내리고, 삼성의 변화가 재계 전체에도 긍정적 파급효과를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성 /사진=연합뉴스
삼성 /사진=연합뉴스

반도체 위기와 '뉴 삼성'의 과제

삼성은 현재 진행형의 위기와 미래 과제가 놓여 있다. 그 중심엔 삼성전자의 반도체 부문 위기가 자리한다. 반도체 사업은 삼성 전체 이익의 핵심축이지만, 최근 몇 년간 전례 없는 침체를 겪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가격 급락과 재고 누적으로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연속 적자를 기록했고, 올해 2분기 삼성전자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55.9% 감소한 4조6000억 원에 그치는 어닝쇼크가 발생했다. 

한때 '초격차'를 외치며 독주하던 삼성 메모리는 SK하이닉스에 글로벌 D램 점유율 1위 자리를 내주는 등 위상이 흔들렸다.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에서도 세계 1위 대만 TSMC와의 기술 격차가 벌어진 가운데, 후발 주자인 중국 기업들의 추격 역시 거세지고 있다. 이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서 해방된 지금,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반도체 경쟁력 회복이 꼽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삼성의 재도약 키워드는 AI와 차세대 메모리다. 초거대 AI 붐으로 수요가 급증한 HBM(고대역폭 메모리)은 메모리 업계의 게임체인저로 부상했지만,경쟁사 대비 제품 개발이 다소 늦어지며 주도권을 선점하지 못했다. 실제로 AI 칩의 핵심 부품인 HBM3 공급을 둘러싸고 엔비디아 같은 고객사 확보 경쟁에서 고전하면서, 삼성 메모리 부문의 수익성 개선도 지연되고 있다.

이 회장은 선밸리 콘퍼런스 참석 당시부터 글로벌 AI 기업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며 HBM 기술 협력과 공급 확대 방안을 모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선 삼성이 머지않아 AI 반도체 특화 투자와 과감한 기술 인수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리더십 쇄신과 조직 개편도 '뉴 삼성'의 한 축이다. 이 회장이 대대적인 쇄신 작업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단순한 경영진 인사 교체를 넘어, 삼성의 지배구조 개선과 경영 문화 변화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편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경영 투명성 강화를 위한 작업이 본격화될 가능성도 크다. 지배구조를 효율적으로 재편하고, 그룹 핵심 계열사들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뉴 삼성'의 청사진이 그려질 수 있다는 기대다.

십 년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삼성에게, 이 회장의 무죄 확정은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과거의 멍에를 벗고 자유로운 두 손으로 삼성의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자유엔 책임이 따른다. 반도체 사업 혁신, 신성장동력 확보, 지배구조 투명성 제고, 글로벌 협력 강화 등 삼성 앞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사법 리스크가 해결된 시점에 이런 과제들이 미뤄질 이유도 없다.

재계 관계자는 "무죄 확정으로 삼성은 위기 극복을 위한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게 됐다"고 평했다. 이제 남은 것은 첫 단추를 끼운 삼성의 거대한 옷을 이 회장이 어떻게 완성해 나갈지에 대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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