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하 스마트에프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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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에프엔 = 김준하 기자| 1993년 8월12일 대한민국은 TV 앞에서 숨을 죽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특별 담화를 통해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진다"는 내용의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발표했다. 부패와 정경유착의 온상이던 가명·차명 계좌의 싹을 자른 '금융실명제'가 도입된 순간이었다.

금융실명제 이전에는 세무 당국이 비실명 자산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이자 소득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성실히 세금을 납부하는 애먼 국민에게 조세 부담이 전가됐다. '어둠의 경제'는 도덕의 문제인 동시에 민생의 문제였다. 조선시대에 복잡한 공물 제도를 악용해 농민을 수탈하던 '방납의 폐단'을 끊어낸 대동법처럼, 금융실명제는 불투명한 시스템의 혜택을 누리는 특권층에 맞서 조세 정의를 실현했다.

하지만 30여년이 흐른 지금, 금융실명제로 세운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이라는 거대한 홍수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법정화폐, 가상자산 등 특정 자산과 연동해 가격 변동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된 가상자산이다. 미국 달러에 가치를 연동한 테더(USDT)와 USD코인(USDC) 등이 가장 흔히 쓰인다. 문제는 이것이 발행돼 개인이 보유한 코인 지갑으로 들어가면 금융실명제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다는 점이다.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의 고객확인제도(KYC)나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의 '트래블 룰'은 불법 거래에 대한 1차 방어선이다. 하지만 이들의 힘은 거래소 내부 거래에서만 유효하다. 사용자는 실명 계좌로 스테이블코인을 구매한 후, 이를 전 세계 어느 지갑으로든 국가·금융기관의 개입 없이 몇 초 만에 전송할 수 있다. KYC, 트래블 룰이라는 감시 카메라는 거래소 내의 '큰길'만을 비출 뿐, 개인들이 다니는 수많은 골목길을 들여다볼 수 없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수많은 불법 거래에 사용되고 있다. 전 세계 GDP의 20%에 달하는 지하경제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의 영향력이 점점 확대돼 달러의 지위에 조금씩 균열을 낼 정도다. 한국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위험천만한 거래에 스테이블코인이 쓰인다고 해도 적발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지난 5월 국내에서 테더 코인으로 약 580억원 규모의 불법 환치기를 벌인 러시아 국적 환전상 2명이 잡혔다. 이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추적되지 않은 암수범죄의 규모는 훨씬 클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가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추진하는 이유는 미국이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앞세워 달러 패권을 공고히 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마치 '트로이의 목마'처럼 각국 화폐 시장에 침투하며 '디지털 달러라이제이션(달러의 지배)' 현상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정부의 고민은 분명 합리적이다. 달러 패권이 디지털 영역으로 확장되는 상황 속에서, 원화 기반의 디지털 자산을 포기하는 것은 통화 주권의 '무장 해제'를 의미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후보 당시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만들어야 국부 유출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공격을 위한 '창'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방패'인 셈이다.

하지만 딜레마다. 방패를 들자니 불법적인 거래가 우려되고, 방패를 내려놓자니 통화 주권이 위협받는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효과적인 방패로 만들려면 더 많은 수요를 만들어야 할 테지만,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검은 돈이 활개를 칠 판이 깔릴 것이다. 한국은행이 우려하듯 통화정책의 유효성이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

한국 정부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있다. 정치권에서 가상자산 2단계 입법을 논의 중이지만, 이 문제들에 대한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현재로선 개인 간 은밀히 벌어지는 가상자산 거래를 일일이 감시하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부는 신중해야 하고, 한번 더 고민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의 홍수에 금융실명제라는 유산이 떠내려가도록 두고 봐서는 안 된다. 스테이블코인의 흐름을 추적하고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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