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옥성호, '기독교 해체 전도사' 변신…"검증 두렵다면 가짜"

2008년 자기신앙 해체(검증) 이후…15년 만에 '유다 컨스피러시' 펴내
가롯 유다 행적 및 예수 십자가 사건 재구성…4복음서 근거 제시 주목
"복음서의 반유대·친로마 정서…유대인 전체를 예수 살인자로 악마화"
권오철 기자 2023-07-30 20:00:10
[스마트에프엔=권오철 기자] "성경 저자가 자신의 목적에 맞춰 고의적으로 편집한 게 복음서란 사실은 지난 40년 내 생애에 대한 일종의 사형 선고였습니다.

…'첨가나 왜곡이 가능하다면 이게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야?…십자가가, 예수의 죽음이 저자에 따라 얼마든지 각색이 가능하다고? 내가 생명까지 바쳐서 지켜려던 십자가가 그런 거였다고?'

…2008년 12월 19일. 마침내 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건 수용도, 타협도 아니고 그냥 포기였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만든 책이고 수많은 오류와 왜곡, 말도 못할 정도의 황당한 모순이 들어있다. 그래. 거기까지만 생각하자. 더이상 따지지 말자.' 그리고 그날 아무도 모르게 나는 오랫동안 울었습니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시작으로 '갑각류 크리스천', '진리해부', '야고보를 찾아서', '서초교회 잔혹사', '영적 대통령', '신의 변명', '부활, 역사인가 믿음인가' 등 다수의 기독교 관련 책을 써온 옥성호는 최근 유튜브 채널 '오디오북 테리토스(옥성호의 진리해부-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통해 이같이 고백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작성된 것으로 번역상 실수는 있을지언정 일체의 내용상 오류가 없다고 믿어온 개신교 개혁주의 신앙인이었으나, 2008년 10월 우연히 E.P. 샌더스의 '역사적 예수'를 읽고 기독교와 자신의 믿음에 대해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 후 옥성호는 15년 만에 '유다 컨스피러시'(파람북/2023.7)라는 새로운 책을 펴냈다. 성경의 4복음서를 근거로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가롯 유다의 행적을 추적하며 십자가 사건을 재해석했는데, 그 내용이 적잖게 충격적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흔히 '배신자'로 알려진 유다를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희생자'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4복음서 곳곳에 숨어있는 모순성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이 책을 읽은 한 독자는 "유다와 관련한 전통적 기독교의 시각을 뒤엎는 저자의 주장은 기존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도록 돕는다"면서 "교회는 보수와 진보를 가릴 것 없이 그의 도전적인 주장에 답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본보는 지난 17일 서울 서초구 모처에서 옥성호를 만나 '유다 컨스피러시'와 관련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옥성호는 자신을 '국내 1호 디컨스트럭션(deconstruction·해체) 전도사'로 소개했다. 

그는 "기독교에 들어가 인생을 걸고 믿었던 사람만이 해체를 언급할 수 있다"면서 "애초에 기독교 울타리 밖에서 성경을 비평하는 이들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이어 "해체란 자신이 믿고 있는 바가 진짜인지 검증하는 것"이라며 "검증이 두렵다면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옥성호는 '유다 컨스피러시'를 통해 자신이 15년 전 경험했던 해체 속으로 독자들을 이끌고 있다. 그는 "해체 이후 보다 견고한 신앙의 성을 쌓을 것인지, 디컨버전(decoversion, 역회심)을 선택할 것인지는 독자의 몫"이라고 했다. 

다음은 옥성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지난 17일 서울 서초구 모처에서 만난 '유다 컨스피러시' 저자 옥성호. 사진=권오철 기자 

-'유다 컨스피러시'는 가롯 유다가 주인공이다. 왜 굳이 '배신자'의 대명사 가롯 유다를 주목했나. 가롯 유다에 무슨 음모가 있기에.

예수와 같이 뛰어난 성인에게서 배신자가 나왔다는 것 자체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도 무려 3년을 동고동락했는데. 애초에 못된 계획을 갖고 잠입했더라도 감동 받아서 변해야하는 게 맞지 않은가? 진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예수도 아니고 단지 기도하는 중에 만나는 예수, 예수의 음성만 한 번 들어도 인생이 바뀌었다는 기독교인이 얼마나 많은가? 다시 말하지만, 유다는 예수와 3년을 같이 살았다. 그런데 여전히 나쁜 놈이다. 게다가 복음서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 있었다고 하는데, 사탄이 예수와 동거동락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예수와 '배신'이라는 단어 자체가 같이 갈 수 없는 거 아닌가? 이건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서 돈을 번 이유가 상해임시정부 김구를 돕기 위해서라는 소리보다 더 황당하다.  

-이 책은 가롯 유다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전통교회가 십자가 사건을 오해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고 보는 것인지. 

가장 크게 오해하는 점은 예수가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졌다고 본다는 거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유다의 배신이 맞다면, 예수는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졌지 결코 자발적으로 지지 않았다. 설혹 자발적이었다고 해도 배신자가 끼어드는 것만으로도 그 '자발성'은 오해를 받기 쉽다. 예수가 정말로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졌다면, 그리고 성경의 진술대로 유다의 배신을 미리 알았다면, 그의 배신을 막든가 아니면 유다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십자가에서 죽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따라서 전후 상황을 볼 때 예수의 십자가는 자발적인 희생이 전혀 아니다. 이 점은 기독교인에게 심각한 문제를 던진다. 기독교는 예수의 희생과 사랑이 핵심인데, 억지로 죽은 걸 희생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예수를 놓고 '사랑의 주님'이니 하는 건 어폐가 있다. 기독교는 유다를 거론해도 무작정 '나쁜 놈'으로 매도하는 게 전부이지 결코 이성과 상식에 입각해서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는 순간 십자가 죽음의 자발성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으니까.  

-십자가 사건과 관련해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질문을 해보자. 복음서를 보면 유대인들이 로마군에 붙잡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외친다. 마치 예수가 극악한 흉악범이나 큰 원수라도 되는 듯이 몰아가는데, 실제로는 가난한 자와 병자를 돌봤던 예수 아닌가. 앞뒤가 안 맞는 유대인들의 집단적 반응이 갑작스럽다.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말 그대로 급작스런 변화이다. 게다가 고작 며칠 전만 해도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를 향해 "호산나"를 외치면서 환영했다고 하지 않은가? 이런 변화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보통 로마를 멸망시킬 거라고 기대했는데 너무도 무력하게 잡힌 모습에 실망해서 화가 난 거라는 등의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한다. 그런데 만약에 안중근이 이토우 히로부미를 암살하지 못하고 어이없이 잡혔다고 치자. 그럼 조선 백성이 실망해서 안중근을 빨리 죽이라고 일본인을 향해서 소리칠까? 아니, 안타까워서 같이 울면 울었지, 죽이라고 외치는 게 말이 되는가? 유대 민족이 무슨 집단 다중 인격자들도 아니고, 이건 아예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시나리오이다. 복음서 저자가 유대인 전체를 악마로 만들기 위해서, 무엇보다 예수를 죽인 살인자가 로마가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신약성서에 반유대·친로마 정서가 흐른다는 해석은 새롭다. 특히 역사적으로 로마로부터 자유를 얻은 기독교의 융성을 놓고 보면 성서 저자의 의도가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신약성서, 특히 복음서는 서기 66년에 발발해서 70년(맛사다 전투까지 포함하면 72년)에 끝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을 빼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대부분 기독교인에 복음서 이해의 핵심인 이 전쟁은 안중에도 없다. 이건 마치 김구 선생 전기에 일제강점기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본을 빼고 김구 선생의 생애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데 기독교인은 로마와의 전쟁을 빼고 예수를, 그리고 복음서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복음서는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로마에게 아부하고 이미 망해서 사라진 유대 본토의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과격분자를 악마화하기 위해서 쓰였다. 복음서 속 로마인은 빌라도를 포함해서 한마디로 '선한 키다리 아저씨'다. 유대인이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예수를 보이지 않게 지키고 돕는 존재들이다. 1세기 초 유대 땅은 미쳐서 날뛰는 바리새인을 빼면 평화, 그 자체이다. 이게, 말이 되나?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를 누가 그런 식으로 그렸다고 생각해보자. 미쳐서 날뛰는 김구, 안중근, 윤봉길 등등의 과격파와 몰래 뒤에서 조선 백성을 돕는 착한 일본인들. 그리고 거기에는 니고데모에 해당하는 착한 이완용도 있고. 이게 복음서의 내용이다.

기독교가 나중에 로마의 국교가 되고 융성한 건 또 다른 문제이다. 복음서 속 반유대, 친로마와는 별 상관이 없다. 그건 철저하게 정치적인 선택이었고, 무엇보다 상하 복종과 수직관계를 중시하는 기독교의 체계가 아우구스티누스 눈에 유용하게 보였을 것이다. 종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스스로 구도를 통해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종교와 위에서 시키는대로 무조건 믿고 복종하는 종교. 전자가 많아지면 통치자는 머리가 아프다. 생각하고 질문하는 사람, 주체적인 머리가 많아지는 거니까. 그런데 후자로 넘치는 사회는 통치자에게 천국이다. 높은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똥을 된장이라고 해도 믿는 사람으로 넘치는 사회, 권력자에게 얼마나 좋겠는가? 게다가 현실은 힘들어도 죽으면 천국가니까 조금만 더 참으라는 말에 다 순종하는 사람들,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종교가 지금의 신약을 정경으로 떠받들던 기독교 분파였다. 내가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해도 이런 기독교를 국교로 만들고 싶었을 거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어떤가. 과거에 비해 나아졌을까. 

아무래도 세상이 달라졌으니까 교회가 과거처럼 마녀라고 아무나 데려다가 불에 태워죽일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는 과거와 비교해서 아주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그건 교회가 나아져서가 아니라 사회가, 사람의 머리가 깨어나서이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바뀔 수 없다. 한 오십 년 전에 미국에서 빌리 그래함이 한창 인기를 얻을 때 라인홀드 니버가 이렇게 한탄했다. "빌리 그래함이 기독교를 다시 100년 전으로 후퇴시켰다." 그 말을 들은 빌리 그래함이 뭐라고 응수했을까? "겨우 100년이라고? 나는 2000년 전으로 되돌리고 싶어." 이게 기독교인의 진심이다. 한국에서 한창 붐을 일으켰던 '성시화 운동'도 다 일종의 그런 시도다. 기독교의 교리에 반하는 소리를 하면 다 입을 막고 싶은 과거,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거다. 왜 그럴까? 불안하니까. 대화를 하면 할수록 기독교의 교리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쉽지 않아서가 아닐까? 차라리 진리라는 이름으로 모두의 입을 막고싶은 게 기독교인이 진심이 아닐까?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유다 컨스피러시' 곳곳에는 4복음서에 존재하는 각종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성서를 성령을 통해 작성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보수 기독교의 뿌리를 뒤흔든다. 그렇다면 성경의 오류를 받아들이고 보다 유연하게 해석하는 진보 기독교가 답이 될 수 있을까.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피부는 백인이고 한국말도 전혀 모르는 사람, 심지어 한국에 한 번도 온 적 없는 사람을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본인이 우긴다고 한국인일까? 진보 기독교인이라는 말 자체가 사실 어폐가 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구원이 무엇인가? 에덴에서 시작한 인간의 원죄로 인해 지옥갈 죄인이 예수의 십자가를 믿고 천국에 가게 됐다는 거다. 단지 예수의 십자가만 믿어서는 안 된다. 부활이 핵심이다. 그런데 진보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은 에덴동산과 원죄 얘기를 하면 웃는다. 예수의 부활? 상징으로 치부한다. 그리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소리를 코미디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근간을 다 부정한다. 그런데 그들이 기독교인인가? 그들은 내가 보기에 그냥 막연한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물론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만) 거기에 더해서 예수가 훌륭한 선생이었다는 정도로 받아들일 뿐이다. 게다가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고 창조가 아닌 진화를 받아들인다. 도대체 왜 그런 사람들이 여전히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심지어 목사까지 하는지, 내게는 미스터리이다. 진보 기독교는 답이 아니라 재앙이다. 기독교에게도 재앙이고 비기독교인에게도 인지부조화의 나쁜 사례가 된다는 점에서 좋지 않다. 

-본인의 처녀작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2007, 부흥과개혁사)'를 펴낼 당시만 해도, 보수 기독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그때와 많이 다른 거 같은데, 변하게 된 계기와 전환점이 있었나.

내가 진행한 유튜브 '옥성호의 진리해부-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에서 거의 두 시간에 가깝게 여기에 관해서 이야기 했는데, 관심있는 분은 들어보길 권한다. 한 마디로 성경 속 오류가 내게는 전환점이 됐다. 벌써 15년 전인데,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성경을 오류가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이상한 구절을 만나도 내가 부족해서,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 이상 나를 속일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고,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성경이 엉터리라는 것을 알면서 그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전한다는 신이 진짜라고 받아들일 방법이 내게는 없었다. 소위 말하는 진보 기독교인처럼 나 자신을 합리화할 것인가, 아니면 내게 정직할 것인가? 내 마음의 평화와 주변 환경의 평화를 위해서 나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무엇이 될지 몰라도 일단 새로운 길을 시작할 것인가? 인생을 두 번 산다면야 어렵지 않은 결정이었겠지만,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다 보니 아주 힘든 시간이었다. 3개월을 고민했고 살이 쭉쭉 빠질 정도로 잘 먹지도 못하는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마침내 나는 선택을 했고, 그날 이후 많은 사람이 나를 떠났고 또 경제적으로 힘들게 됐지만 후회는 없다. 기독교인일 때와 지금은 차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다.  

-앞으로의 집필 계획은?

현재 '서초교회 잔혹사' 개정판을 쓰고 있다. 거의 완성한 단계이다. 너무 대충대충 쓴 거 같아서 항상 마음에 걸리던 책이었는데, 이번에 그 부담을 털어낼 수 있을 거 같다. 그리고 '옥성호의 빅 퀘스천' 시리즈로 기존 3권에 이어 4·5권을 준비 중이다. 그중에서 4권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관한 것이다. 흔히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일등 공신이 된 그 구절의 정체가 무엇인지 지극히 상식 차원에서 풀어내는 내용이다. 최대한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 중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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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선영
    박선영 2023-10-07 21:08:48
    참 그리고 자의적 해석과 성경 오독이 많아서 짧게 말할께요 친로마 반유대적 글쓰기라는 이해는 그리스도-메시야가 유대 민족 뿐 아니라 만인(인류 전체) 구원을 전했기 때문에 그리 읽으셨나 싶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의 심판을 방치한 직접적 리더십이지 선한 키다리 아저씨?가 아닙니다. 예수박해는 유대민족의 문제로 여겼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방관(식민지 문화로 인정)한 것이지요. 니고데모, 요셉, 백부장, 회당장 야이로 모두 친로마적 해석이 아니라 보편적 구원을 인정한 사례로 봐야죠. 결국바울의 복음이 로마를 흔들어놓은 것은 설명이 안됩니다.
  • 박선영
    박선영 2023-10-07 20:53:10
    더욱 무거운 질문에 답을 해야 하네요. 씨에스 루이스가 어느날 밤 혼자 씨름했던 서재에서의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작가님과 다른 선택을 한, 그리스도의 길을 날마다 확인하며 걷는, 저란 신자의 이야기인데요. 당신의 혼란과 고민, 응원합니다. 그리고, 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서 계실텐데 어떻게 역사적으로 성서적으로 증명할지 모르게네요. 기도할께요. 우리 모두가 놀라운 신의 위로와 구원을 얻기 전에는 여전히 진리를 찾아 헤메는 어둠속 외로운 영혼이기에. 지금도 더듬으며 어둠 속에서 신과 교제해야 하는 천국과 지옥사이의 존재이기에
  • 박선영
    박선영 2023-10-07 20:50:10
    메시지 자체가 신(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가 보내신 성령하나님)임을 삶 속에서 실현하며 경험하는 것 즉 삶의 과정(시간과 사건의 연합)임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불완전하고, 믿기 힘든 메시지이지요. 그래서, 경계선상에서, 가롯유다의 선택이냐 베드로의 선택이냐를 현재 우리도 목숨걸고 해내는 중입니다. 억지로 비이성적으로 주입당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그것과는 결이 다른 질문, 역사적으로 증명되기 어려운 불완전한 성경 속의 존재인 성령을, 불완전하고 전적 무지와 어둠에 놓인 인간이 엎드려 받아드릴 것인가라는
  • 박선영
    박선영 2023-10-07 20:46:42
    성경의 무오성과 역사성에 근거한 칼빈주의 역시 그리스도의 신성과 희생, 그리고 인간 죽음과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듯 합니다. 성경 자체의 역사적 오류 가능성과 조작 가능성 역시, 고대 인간사의 형성 과정을 볼 때 가능한 일이지요. 기독교는 논리적으로 완벽함을 증명해야 하는 변증적 차원이 있습니다만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 체계라기보다는 기독교가 인류에게 전하고자 한 핵심적 메시지를 통해, 인간 개개인이, 공동체가, 불완전하지만 신비한, 사랑과 희생의 신의 속성에 대해 낮추어 받아들이고
  • 조성민
    조성민 2023-08-20 12:23:56
    종교 기독교는 알아도 신앙은 모르는... 안타깝습니다
  • 설경은
    설경은 2023-08-03 00:55:57
    참으로 안타까운 영혼이네..